송시열 등에 대한 극형을 주장하는 과격파와 이에 반대하는 온건파로 갈리어 이들을 청남탁남이라 불렀다. 하지만 새로 집권한 남인은 그 전횡이 심하여 밀려나고 또 다시 송시열을 비롯한 서인이 재등용되었다. 그러나 서인 사이에도 분열이 생겨 송시열을 중심으로 한 노론과 윤증을 중심으로 한 소
송시열77세상(宋時烈77歲像)’은 지금까지도 전해오고 있다. 하지만 그가 벼슬길을 선택하지 않은 것은 단지 예술적 재능 때만은 아니다. 당시의 정치적 상황이 그로 하여금 벼슬길을 포기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17세기 후반부터 남인과 서인의 정치적 분열이 심화되기 시작하였다. 김창업이 진사에 합
부른다. 이곳에는 주자와 송시열을 모신 남강원과 어필각이 같이 있기 때문이다. 어필각의 근본이 된 남강원은 1803년 송시열의 후학들이 송시열이 죽기 전 제주로 귀양갈 때 풍랑으로 떠나지 못하자 만덕산 백련살에 머물러 있으면서 며칠간 강의한 것을 기념해 영정을 백련사에 모신 영당이 시초다.
송시열의 정치세력에 속하고, 노론의 일원이었지만 송시열의 명분론을 불신하였다. 송시열의 명분론은 중국을 세계의 중심으로 삼고, 화이론(존화양이론尊華攘夷論. 중국을 존중하고 오랑캐를 물리친다는 뜻으로, 조선시대 성리학적 명분론에 입각해 취한 대외정책)을 엄격하게 지키는 것을 특히 사
Ⅰ. 머 리 말
한국 역사상 가장 치열한 논란의 대상. '조선왕조실록'에 3천번 이상 언급된 조선 최대 당쟁가,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송시열은 83세 때 '죄인들의 수괴'라는 애매한 죄목으로 사약을 마시고 생을 마감했다. 당시 노론(老論)의 수장이었던 그는 당파 싸움에 밀려 처형당했지만 죽
광해군 집권: 북인이 정권 주도
대북 : 정통성을 지키기 위해 임해군, 영창대군 제거, 인목대비 폐위
인조반정: 북인 몰락
-대북의 독주에 대한 서인의 반발
산림의 진출
-송시열, 송준길, 김집 등 호서 산림 대거 진출 –강한 학문적 연대를 바탕으로 강력한 정치 세력으로 부상
예송 논
송시열 백호 윤휴와 서계 박세당의 탈주자적 해석 비판
(2) 백호 윤휴
1>한나라 시기의 주석을 참조하여 독자적인 입장
2>『대학』과 『중용』을 중심으로 한 주자의 『사서집주』비판
중용설: 종교성을 회복, 실천적 유학 이론을 전개
3> 우암 송시열이 사문난적이라 지탄
4> 고대의 실천적
송시열의 제자인 권상하의 제자인 외암 이간과 남당 한원진은 이를 본격적으로 논하기 시작하였다. 두 학자는 인성과 물성이 과연 같으냐 다르냐 하는 문제, 미발의 심체는 과연 순선한 것이냐 악할 수도 있는 있느냐 등의 문제에 이르러 서로의 견해를 주장한 것이다. 이들의 견해차는 점차 확대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