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악은 ‘추가’할 시인으로 다뤄지고 있는 게 아쉬운 점이다(백석은 다른 시인들에 비해 면밀한 탐구가 이뤄지지 못했고, 이용악은 이름만 나오고 있다). 식민지 후기 시적 공간에서 ‘전통’이 된 김소월, 정지용과 모더니즘, 현대에 와서 밝혀지는 백석의 시 세계는 「한국어의 훈련과 의미」에
이용악은 「피발 선 새해」(1951)를 발표하여 조국 해방을 위한 투쟁의 필연성을 내세워 전쟁을 합리화하고 있으며, 백인준은 「얼굴을 붉히라, 아메리카여」에서 한국전쟁에 참여한 미국을 격렬하게 비난하고 있다. 조기천의 장시 「조선은 싸운다」(1951)는 혁명 투쟁의 과정으로서의 전쟁과 그 승리를
이용악의 시를 즐겨 읽었고 고등학교 졸업반 때에는 열 권짜리 일어판 도스토옙스키 전집을 읽었다. 그밖에 투르게네프의 소설들과 임화, 오장환, 정지용의 시집 등을 읽느라 밤을 지새우기도 했다. 대한교육연합회 주최 중·고등학교 문학 콩쿠르에서 산문부분에 당선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교지에
이용악임화오장환정지용의 시집 등을 읽느라 꼬박 밤을 새우곤 했으며 대학 입시를 앞두고도 공부대신 도스토예프스키 전집과 투르게네프 소설들을 독파해내곤 했다. 뿐만 아니라 교지에 평론「이형기론」을 발표하기도 하였고 교육기관 주최 문학콩쿨 대회에서 산문부문에서 당선의 영예를 안기도
이용악, 임화, 박세영, 윤곤강, 이찬 등과 함께 참여하였다.
그는 1937년 3월에 다시 일본 명치대학에 입학하였고, 【자오선】 【자오선】은 1937년 11월 창간되었다. 오장환은 여기에 「황무지」, 「신부의 노래2」등을 실었다.
동인으로 참여하여 시작 활동을 하였다. 그해 8월 첫 시집 『성벽』이 자비로
이용악의 『오랑캐꽃』등이 이때 빼앗긴 책들인데. 『사슴』을 빼앗긴 일이 가장 억울했다. 다행히 『사슴』의 시들은 거의 외고 있었지만. 이 일로 나는 얼마동안 시를 읽는 흥미도 시집을 사는 재미도 잃었다. 생각해보니 60 후반 내가 다시 시를 쓰기 시작하기까지 나는 단 한권의 시집도 사지 않았
박남수는 1918년 5월 3일 평양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평양 숭인 상업을 거쳐 일본 동경 중앙 대학 법학과를 졸업하였다. 유학 시절 제1회 <문장>지의 추천을 받은 김종한, 이용악 등과 사귀게 되면서, 그들의 권유로 <문장>지에 투고하였는데, 1939년 "심야","마을","밤길", "거리" 등이 정지용에 의해 추천되어
이용악, 임화, 박세영, 윤곤강, 이찬 등과 함께 참여하였다.
그는 1937년 3월에 다시 일본 명치대학에 입학하였고, 【자오선】 【자오선】은 1937년 11월 창간되었다. 오장환은 여기에 「황무지」, 「신부의 노래2」등을 실었다.
동인으로 참여하여 시작 활동을 하였다. 그해 8월 첫 시집 『성벽』이 자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