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시인 이육사
[1]이육사의 생애
한국의 시인.
호 : 육사(陸史)
본명 : 원록(源祿),활(活)
출생지 : 경북 안동(安東)
주요작품 : 《절정》,《광야》,《청포도》,《교목》, 《꽃》
호 육사(陸史). 본명 원록(源祿),활(活). 경북 안동(安東) 출생. 조부에게서 한학을 배우고 대구 교남(嶠南)학교에서 수학, 1925
이 육 사
1.이육사의 생애
호는 육사(陸史). 본명 원록(源祿),활(活). 1904년 음력 4월 4일 경북 안동군 도산면 원촌리에서 둘째로 출생. 이퇴계의 14대손으로 태어났다. 이 시절 선비의 자녀들이 대개 그러했듯이 육사도 다섯살 때 할아버지에게서 한문을 배우는 등 어린시절에는 전통적인 한학을 공부했다.
이육사 등과 ‘시인부락’동인에 참여하였다. 이듬해 김상원, 오장환, 윤곤강, 이병각, 이성범, 이육사, 서정주 등과 ‘자오선(子午線)’동인을 결성하고 동인지 「자오선」발간에 참여하였다. 1938년에는 군산에서 서울 본사로 올라와 다옥동에서 하숙을 하며 문단 활동을 활발히 벌였고, 1939년 첫 시집
이육사의 시와 함께 민족 자체를 말살하려는 일제의 야수적 폭압 아래 질식 상태에 따진 민족문학의 마지막 명맥을 이은 것이라는 점에서 보면 그의 시를 넓은 의미의 저항시라고 규정한다고 해도 과히 지나친 일은 아닐 것이다. 말하자면 윤동주의 시는 일견 소극적인 자기성찰에 머무르고 있다는 점
이육사를 만나게 된다. 우연히 《신조선》편집을 담당하면서 본격적인 문단 활동을 시작했다. ‘석초(石初)’라는 필명을 사용하여 「비취단장」 그의 첫 작품 「비취단장」은 처음 발표할 때는 19행이었으나 그후 『문장』(1940)에선 7연 50행으로, 『바라춤』에서는 6연 49행으로 꾸준히 개작된다. 이외
이육사 [ 李陸史 , 1904.4.4~1944.1.16 ]
년도
연보
1904년
5월 18일(음 4.4) 경북 안동시 도산면 원천리(당시 원촌동) 881번지에서 출생,
어릴 때 이름은 원록(源祿), 두 번째 이름이 원삼(源三), 자는 태경(台卿)
1921년
영천군 화북면 오동(梧洞) 安庸洛의 딸 일양(一陽)과 결혼
1924년
4월 학기에 맞추어 일본 유학
19
이육사와 「참회록」「또 다른 고향」의 윤동주가 바로 그들이다.
이와 같이, 1930년대부터 1945년 해방이전에 이르는 이 시기의 우리 시문학은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강점당한 현실에 맞서 우리 민족 문화 예술을 가꾸어 나가는 한편, 근대성을 확보해 나가야 했던 시대적 과제 속에서 실로 다양하고 옹
이육사, 이병각, 김관 등을 위시하여 몇몇 화가 친구들과 만나다가 그들을 중심으로 자오선 동인을 결성하고 시지『자오선』을 간행하기까지 한다. 간혹 그를 시인부락 동인에도 가담했던 것으로 말하기도 하지만, 실제로 『시인부락』지에는 단 한편의 작품도 발표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볼 때, 시인
암시하는 또 다른 의미의 영역을 나타낸다. 「장미꽃」이라는 낱말이 하나의 구체적·감각적 인상을 되살리는 데에서 그친다면 그것은 심상이고 정열또는 쉽사리 사라지는 사랑의 아름다움 등의 뜻을 가리키든가 암시하면 상징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가령 +는 병원·예수 그리스도·교통안전 표지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