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초(石艸) 신응식 - 작품 경향과 변모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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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초(石艸) 신응식 - 작품 경향과 변모 과정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석초(石艸) 신응식 (1909-1975)
1. 생애
본명은 응식(應植), 일명 유인(唯仁), 호는 석초(石初) 혹은 석초(石艸). 1909년 충남 서천군 한산면에서 부친 신긍우와 모친 강긍선의 2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석북(石北) 조선 후기 당시 널리 애송되었던 《관산융마(關山戎馬)》를 지은 문신. 효성이 지극하였으나 오랜 관직생활에도 노모(老母)를 모실 집이 없는 사실이 알려져 왕으로부터 집과 노비를 하사 받기도 하였다. 주요 작품으로 《부해록(浮海錄)》, 《석북집(石北集)》 등이 있다. 그의 시는 당시의 현실을 담고 있거나 우리나라의 신화나 역사를 소재로 하여 민요풍의 한시로 표현하고 있어, 한문학사상 의의가 매우 크다.
신광수(申光洙)의 후손답게 그의 가계는 사대부 가문으로서의 명성을 내내 유지했다. 그는 부유한 가정에서 출생하고 성장하여 풍족한 삶을 살았다. 신학문에 큰 관심을 기울인 개화된 선비의 풍모를 갖춘 그의 부친은 석초에게 두 사람의 가정교사를 두고 한학과 신학문을 동시에 교육시켰다. 또한, 부친은 권국담 선생을 초빙하여 석초의 한학 지도를 부탁했다. 국담 선생은 종종 석초에게 이백과 두보와 소동파 얘기를 해주었다. 석초의 집은 두 할머님을 모시고 살았는데 특히 친가 어른께서는 한문과 한글을 모두 잘 하셨고 글씨도 주옥같았다. 어린 석초에게 고전소설을 들려주셨다고 한다. 석초는 사서삼경을 떼고 1921년 정규과정을 거치지 않고 한산초등학교 2학년에 입학했다. 1925년 석초는 상급학교 진학을 위해 초등학교를 자퇴했다. 우수한 성적으로 5학년을 마치고 검정고시에 합격, 최고의 명문인 서울에 있는 경성제일고보에 입학했다. 1926년 봄, 당시에 아직 잔존하던 조혼 풍습으로 아버지의 강행에 의해서 2살 연상인 강영식과 혼인하였다. 그는 선천적으로 약했고 자주 앓았다. 1927년 한 차례 학교를 휴학했고 1928년 신병을 이유로 자퇴했다.
1929년 유학길에 올라 일본에 체류하며 학업에 전념한 그는 1931년 법률을 전공하라는 부친의 의사와는 달리 호세이대학(法政大學)의 철학과에서 수학했다. 이 시기에 그는 인생에 대한 방황과 고민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방황과 고민을 타개하기 위해 서양의 문학 서적들을 읽었다. 그 무렵 폴 발레리 20세기 전반 프랑스의 시인·비평가·사상가. 말라르메의 전통을 확립하고 재건, 상징시의 정점을 이뤘다. 20세기 최대 산문가의 하나로 꼽힌다. 산문작품은 다방면에 걸치며 평론이 가장 많다.
의 작품을 읽은 후 감명 받아 인생의 지표로 삼는다. 급기야 불어로 발레리의 작품을 통독하고자 동경에서 특별히 불어 개인교습을 받기도 한다. 당시 그를 가르치던 선생은 프랑스 여성인 잔느 시게노 부인이었다. 석초는 일주일에 두 번 그녀로부터 교습을 받았는데, 그 때 그는 교습뿐만 아니라 그녀의 해박한 지식에 압도당했다. 이 무렵 그는 일본에 만연되어 있던 사회주의 사상을 만나 1930년~32년 카프에 가담한다. 임화, 안막, 박영희 그리고 국제적인 무용가 최승희와 활발하게 교류했다. ‘유인(唯仁)’이란 필명으로 1931년에 《중앙일보》에 평론 「문학창작의 고정화에 향하여」를 발표하였고 1932년엔 《신단계》에 「예술적 방법의 정당한 이해를 위하여」를 발표하였다. 그러나 카프의 창작방법론에 대한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과정에서 1933년 박영희와 함께 카프를 탈퇴했다.
1935년 귀국하여 그의 시작에 많은 영향을 주었던 한학의 스승인 위당 정인보와 절친한 벗이었던 이육사를 만나게 된다. 우연히 《신조선》편집을 담당하면서 본격적인 문단 활동을 시작했다. ‘석초(石初)’라는 필명을 사용하여 「비취단장」 그의 첫 작품 「비취단장」은 처음 발표할 때는 19행이었으나 그후 『문장』(1940)에선 7연 50행으로, 『바라춤』에서는 6연 49행으로 꾸준히 개작된다. 이외의 많은 작품들에서 개작과 재수록이 이루어진다. (조용훈(2001) ‘신석초연구’. 도서출판 역락 )
, 「밀도를 준다」등을 발표했다. 이육사는 신석초에게서 시작 초고들을 뺏다시피 해 잡지에 발표해 주곤 했다. 석초를 훗날 《자오선》 동인으로 일컫는 것도 이런 연유에서였다. 석초는「호접(胡蝶)」,「무녀의 춤」을 《자오선》1호에 발표하였다. 《자오선》은 시인 민태규를 발행인으로 창간된 시전문지로서 1937년 11월에 창간하자마자 수명을 다했다. 주로 생명파로 지칭된 오장환, 서정주, 함형수 외에도 김광균, 민태규, 이육사 들의 작품을 대대적으로 수록했다.
이어 1939년 《시학(詩學)》 지에 「파초」(1호), 「가야금」(2호), 「묘 (墓)」(4호) 등을 발표하였다. 1942년 일제의 탄압으로 인해 『문장』이 폐간되었는데, 여기에 석초는 「발레리 연구」라는 논문과 「바라춤」,「궁시(弓矢)」 2편을 실었다. 1946년 첫 시집 『석초시집』을 간행하였고 이후 1956년 사무국장에 선임, 『현대문학』시 추천 위원으로 임명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이어나갔다. 1959년 두 번째 시집 『바라춤』이 간행되었고 세 번째 시집 『폭풍의 노래』(1970), 네 번째 시집 『처용은 말한다』(1974), 『수유동운』(1974)을 간행한 후 1975년 천식과 장출혈로 사망했다.
2. 작품 경향과 변모 과정
(1) 초기시
가속화되는 일본제국주의의 침탈정책으로 당시 한국의 많은 문인들의 항전 논리는 투쟁과 침묵 두 방향이었다. 석초는 침묵 쪽이었다. 그는 시대적 절망을 정인보의 조선주의에서 찾아 전통을 추구하는 방식으로 나갔다. 석초의 초기시는 생명파와도 매우 유사했다. 유하한 생을 극복하기 위해 몸부림쳤다. 그의 시는 원초적이고 관능적이고 감각적이었다. 유한자적 존재를 영원자적 존재와 대비시켜 유한자적 존재의 한계를 극복하고자했다. 그의 정신은 멸하지 않는 것이었다. 석초는 서구적인 것은 프랑스 발레리에서 전통적인 것은 위당 정인보에서 시세계를 구축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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