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시인 이육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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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민족시인 이육사
[1]이육사의 생애
한국의 시인.
호 : 육사(陸史)
본명 : 원록(源祿),활(活)
출생지 : 경북 안동(安東)
주요작품 : 《절정》,《광야》,《청포도》,《교목》, 《꽃》
호 육사(陸史). 본명 원록(源祿),활(活). 경북 안동(安東) 출생. 조부에게서 한학을 배우고 대구 교남(嶠南)학교에서 수학, 1925년 독립운동단체인 의열단(義烈團)에 가입, 1926년 베이징[北京]으로 가서 베이징 사관학교에 입학, 1927년 귀국했으나 장진홍(張鎭弘)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연루되어 대구형무소에서 3년간 옥고를 치렀다. 그 때의 수인번호 64를 따서 호를 ‘육사’라고 지었다. 출옥 후 다시 베이징대학 사회학과에 입학, 수학 중 루쉰[魯迅] 등과 사귀면서 독립운동을 계속했다.
1933년 귀국, 육사란 이름으로 시 《황혼(黃昏)》을 《신조선(新朝鮮)》에 발표하여 시단에 데뷔, 신문사 ·잡지사를 전전하면서 시작 외에 논문 ·시나리오까지 손을 댔고, 루쉰의 소설 《고향(故鄕)》을 번역하였다. 1937년 윤곤강(尹崑崗) ·김광균(金光均) 등과 함께 동인지 《자오선(子午線)》을 발간, 그 무렵 유명한 《청포도(靑葡萄)》를 비롯하여 《교목(喬木)》 《절정(絶頂)》 《광야(曠野)》 등을 발표했다. 1943년 중국으로 갔다가 귀국, 이 해 6월에 동대문경찰서 형사에게 체포되어 베이징으로 압송, 이듬해 베이징 감옥에서 옥사하였다. 일제강점기에 끝까지 민족의 양심을 지키며 죽음으로써 일제에 항거한 시인으로 목가적이면서도 웅혼한 필치로 민족의 의지를 노래했다. 안동시에 육사시비(陸史詩碑)가 세워졌고, 1946년 유고시집 《육사시집(陸史詩集)》이 간행되었다.
[2]작가론
1.기계주의 비인간화에 대한 반발에서 출발
그의 시는 현대의 기계주의 적 비인간화에 반발하여 인간의 생명 자체를 추구한다. 그의 시는 끝없는 방랑에서의 회상(향수)과 초극 의지에서 비롯된 기다림의 양극에서 분비되는 인간적 고통과 어려움을 시로 형상화함으로써 시대적 상황 속에서의 개인적 서정의 심화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육사시의 본도(本道)가 생명 적인 것의 추구에 있음을 보여준다. 한편 예술성의 심화에 대한 육사의 끈질긴 집념을 볼 수 있다.
2.그의 시는 전통적 요소를 지닌다.
그의 시가 엄격한 행(行)과 연(連) 구성의 성형 의식과 가락을 견지하고 있는 것은 육사의 시 의식이 고전적인 선비 의식과 한시의 영향, 그리고 유교적 엄숙성에 정신적 혈맥을 두고 있음을 뜻한다.
3.남성적이고 대륙적인 입김을 불어넣다.
신시사(新詩史)에 있어 대부분의 시가 센티멘털리즘에 감염된 여성적 체질을 갖고 있음에 비추어, 육사의 시가 여성적 감수성에 대륙적 기상과 남성적 의지를 불어넣음으로써 한국 시가 튼튼한 체질을 형성하는데 커다란 기여를 했다는 점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