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하기로 하고 항복했다. 그 때가 서기 512년이었다. 또 『삼국사기』「신라본기」지증왕 13년에는 ꡒ6월 여름에 우산국이 귀속되다. 우산국은 명주의 정동 바다 한 가운데에 있는 섬으로 울릉도라고도 한다ꡓ 고 밝히고 있다. 신라에 복속하게 된 우산국이 울릉도에만 한정된 것인지 아니면 그
속문화보급 → 생산력의 증대 → 씨족사회의 붕괴 → 부족장의 등장
* 부족간의 힘의 우렬 발생 → 우세한 부족장이 주위 읍락 통합 → 초기국가의 대두
② 건국
* 단군의 건국 : 「삼국유사」「제왕운기」「세종실록지리지」「응제시주」「동국여지승 람」에 건국신화 수록
* 단군신
신증동국여지승람을 살펴보면 조선 전기를 대표하는 지리지로써 내용은 경기 이하 각 도의 연혁, 풍속, 사당, 궁궐, 관부, 학교, 교량, 성곽, 산천, 등 각 지역의 수많은 정보들을 담고 있다. 따라서 모든 방면에 걸친 종합적 성격을 지닌 백과전서식 서적으로 조선 전기 사회의 여러 측면을 이해하는 데
Ⅰ. 일본측 사료에 의한 일본의 주장
1. 도해면허(渡海免許, 1618 / 1661)
도꾸가와막부는 1618년에 오오다니와 무라가와 두개 가문에 죽도에서 전복과 강치를 잡고 박달나무와 대나무 등의 삼림을 벌채할 수 있도록 도해면허를 발부하였으며, 1661년 송도(독도)에 대한 도해면허까지 발부하였다. 이러한
속 도서인 독도로 우산이라는 명칭이 이동하게 되었다. 조선 1432년 (세종 14)에 편찬된 지리지 강원도 울진현조에서도 "우산, 무릉 두 섬이 (울진)현 정동(正東) 바다 한가운데 있다"하여 동해 상에 무릉과 우산의 두 섬이 있다는 것을 더욱 분명히 하였다. 1531년 (중종 26)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 강
속 도서인 독도로 우산이라는 명칭이 이동하게 되었다. 조선 1432년 (세종 14)에 편찬된 지리지 강원도 울진현조에서도 "우산, 무릉 두 섬이 (울진)현 정동(正東) 바다 한가운데 있다"하여 동해 상에 무릉과 우산의 두 섬이 있다는 것을 더욱 분명히 하였다. 1531년 (중종 26)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 강
공사가 시작되면서 같은 해 11월에 비변사에서 북한산에 축성할 것을 청하고, 12월에는 축성의 이해관계를 의논하였으나 강화의 축성이 끝난 후 논의하기로 다시 미루어졌다. 이후 여러 차례 축성론이 다시 일어났으나 그때마다 반대론에 밀려 연기되었다.
축성을 반대하는 이유는 기근과 재난 등으
다. 궁궐 공사(1608년~)
상께서 슬프고 괴로워하고 계시는 가운데 상당히 편치 못하신 징후가 있는데, 현재 거처하시는 방이 비좁고 옹색하여 조섭(調攝)하시는 데에 적합하지 않으니, 속히 다른 곳으로 거처를 옮기셔야 합니다. 궁장(宮墻)을 수리하는 일에 대하여 일찍이 전교하셨는데도 해조(該曹)가
, 물개바위 등 부속섬과 암초가 밀집해 있고 수심 2 - 3m에서 출발해 경사 1 - 2도로 뻗어가는 파식 대가 발달해 있다. 동도와 서도는 토양층의 형성이 불량해 나무라고는 보이지 않는 암회색, 암갈색 화산암으로 이뤄져 있고 바위절벽으로 둘러싸여 있어 사람이 살기엔 적합치 않은 여건을 갖추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