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전체에 이름을 떨치게 된 계기는 우왕6년(1380)에 하삼도에 침범한 왜구를 토벌한 일이었다. 아군의 수보다 무려 10배 이상 많았던 왜구를 크게 격파했던 이 싸움의 이름은 황산대첩으로써, 당시 이성계의 나이 45세였다. 당시만 해도 이성계는 최영과 함께 고려를 지탱하는 두 기둥 중 하나였다.
1. 조선의 울릉도·독도 정책과 일본의 대응
"조선전기 태종은 울릉도는 바다 한가운데 멀리 떨어져 있는 섬이므로 사람들이 쉽게 찾아가지 않는 땅이므로 군역을 피하여 도망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며, 또한 울릉도에 사람이 살게 되면 반드시 왜구들이 노략질을 할 것이고 이로 인해 왜구들이 강원도
야인들에게 효과적이었던 금비책이 16세기 중반이후에 왜구들에게는 소용없는 방책이 되고 말았다. 4면이 바다로 둘러쌓인 일본은 1550년경 포르투갈 상인으로부터 스페인 총인 아퀴버스(Arquebus)를 들여오게 되고 그 우월성이 무너지는 순간 치세는 끝이나고 7년간의 조일전쟁으로 접어들게 된다.
일본은 한국령 독도를 일본령 '다케시마'로 개명하며 시마네현 은기도(隱岐島)의 소관으로 1905년 2월 15 일에 일본내무성의 결정으로 독도를 강제적으로 일본령으로 편입하였으며, 1905년 8월 19일에는 독도에 망루를 준 공하였<극비 명치삼십칠팔년 해전사>기에, 러시아 함대를 맞아 대승을 거두게 되었
고려 원종 15년(1274) 고려와 몽고 연합군이 일본 원정을 단행했을 때, 일본 군선과 몽고의 군선은 풍랑에 파손됐으나 고려선 만은 완전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것은 일본과 몽고의 군선이 쇠못을 사용해 풍랑에 쇠못 구멍이 점차 넓어져 자연 파손됐으나, 고려 군선은 나무못을 사용하고 가룡목이 풍랑에
Ⅰ. 머리말
서기 1274년과 1281년 두 차례에 걸쳐 이루어진 몽고(元)의 일본원정(日本遠征)은 원정 주력군(主力軍)을 제공하고 많은 양의 전쟁 물자를 공급한 고려(高麗)의 일본원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高麗 측이 실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단지 高麗가 자주적인 입장에서 일본원정을
일본은 대한제국을 탄압하였으며, 1912년 6월에 105인 사건이 있은 후 유인석이 북간도로 들어가 그 때부터 만주가 애국지사들의 독립운동 본거지가 됐다. 이시영 여섯형제들도 만주 통화현으로 망명하였으며 이승만과 안창호는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김좌진, 안창호, 노백린 등은 군대를 키워 나라힘을
일본정책은 여말․선초 왜구문제로부터 시작된다. 즉 당시로서는 북쪽의 대륙세력에 대처하는 것만큼, 남쪽의 왜구에 대한 대응도 국가안위에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따라서 여말․선초의 대일관계는 왜구금압을 위한 것이 일차적인 목적이었고, 외교와 통상은 그것을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건
일본 및 서양의 역사를 시대별로 다루었으며, 제3세계의 역사에 대해서도 상당한 지면을 할애하였다.
메이지 유신은 19세기 일본이 막부를 타도하고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집권 체제를 복구하여 정치·경제·문화 전 분야에 걸쳐 근대화를 성공시킨 일련의 개혁을 말한다. 아시아 최초의 성공한 근
일본의 안전보장조약’이다. 그에 의해 「인력과 물자의 협력」이라는 미일동맹의 기본구조가 형성되었다. 그러나 이는 미군의 주둔을 규정, 일본 내의 기지를 제3국에 대여할 경우 미국의 동의권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비롯하여 일본에 내란이나 소요가 발생하여 일본정부의 요청이 있거나 일본이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