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머 리 말
한국 역사상 가장 치열한 논란의 대상. '조선왕조실록'에 3천번 이상 언급된 조선 최대 당쟁가,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송시열은 83세 때 '죄인들의 수괴'라는 애매한 죄목으로 사약을 마시고 생을 마감했다. 당시 노론(老論)의 수장이었던 그는 당파 싸움에 밀려 처형당했지만 죽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의 스승이었으니 실로 조선조 예학파(禮學派) 유학(儒學)의 거두였다. 그의 할아버지 반(槃, 1580-1640)은 호를 허주(虛舟)라 하는 이로 벼슬이 이조참판에 이르렀다. 그의 아버지 익겸(益兼, 1614-1636)은 성균관 생원으로서 병자호란 때 순절했는데, 그때 만중은 어머니 뱃속에 있었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 1695년에 배향), 제주목사를 역임한 규암(圭庵) 송인수(宋麟壽 : 1682년에 배향)를 말한다.
이 곳에는 지금도 오현의 위패를 상징하는 조두석(俎豆石)이 놓여 있다. 그리고 이 유적 내에는 ‘증주벽립(曾朱壁立)’의 마애명과 귤림서원묘정비(橘林書院廟庭碑), 향현사유허비(鄕
인물성동이 논쟁 - 이간, 한원진
논쟁의 발단
한국에서 인성과 물성에 관한 논쟁은, 좀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율곡 이이(栗谷 李珥, 1536~1584)와 우암송시열(尤庵宋時烈, 1607~1689)의 학파에 섬으로써 회암사상을 계승하는 수암 권상하(遂菴 權尙夏, 1641~1721) 문하에서 발생하였다. 그의 문하에는 이른바
우암송시열(尤庵宋時烈, 1607~1689)로 이어지는 기호학파의 수암 권상하(遂庵 權 尙夏, 1641~1721)의 문하에서 제기되어 본격화된다. 그의 문하에는 이른바 ‘강문팔학사(江門八學士)’로 불리는 8인의 학자가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남당 한원진과 외암 이간이 가장 뛰어나 강문쟁론(江門爭論)의 장본인
유학 사상이 등장
2> 백호 윤휴(白湖 尹鑴)와 서계 박세당(西溪 朴世堂)의 탈주자적 경전 해석은 집권 세력인 노론의 영수 우암송시열(尤庵宋時烈)이 격렬하게 비판
(2) 백호 윤휴
1> 주자의 경전 해석을 그대로 따르지 않고 한나라 시기의 주석과 해설을 참조하여 독자적인 입장을 펼침
시문 24종을 모아놓은 것인데, 크게 보면 주자의 <무이도가>, 이이와 관련된 것, 송시열과 관련된 것, 권상하와 관련된 것, 옥소가 쓴 구곡에 관한 것의 다섯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이러한 체계를 정리한다면 다음과 같다.
武夷櫂歌詩(朱子)
高山九曲記(崔)
高山九曲歌(李珥)
高山九曲歌詩(宋時烈)
송시열77세상(宋時烈77歲像)’은 지금까지도 전해오고 있다. 하지만 그가 벼슬길을 선택하지 않은 것은 단지 예술적 재능 때만은 아니다. 당시의 정치적 상황이 그로 하여금 벼슬길을 포기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17세기 후반부터 남인과 서인의 정치적 분열이 심화되기 시작하였다. 김창업이 진사에 합
예학의 강화-김장생, 송시열의 사상
1.성리학 시대에서 예학 시대로
조선 후기 사상사에서 주목해야 할 흐름의 하나가 예학의 발전이다. 대개 임진왜란 이후부터 실학이 대두하기 이전 1백여 년을 ‘예학시대’로 규정한다. 17세기에 예학이 발전한 것은 조선유학의 한 특색으로 근세유학의 변천 과정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