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빌라이의 딸의 결혼
1274년 음력 5월 원나라 수도 연경에서 성사된 결혼. 고려 원종의 장남인 왕심(훗날의 충렬왕)은 홀도로게리미실이라는 원 황제 쿠빌라이의 딸과 혼례를 치른다.
-충선왕과 원나라 보탑실련의 결혼
충선왕은 충렬왕의 아들로, 쿠빌라이 황제의 외손자라는 배경을 가지고 몽골
쿠빌라이와 배 다른 동생 아릭 부케 사이의 대권을 둘러싼 치열한 계승분쟁이 일어나 혼란스러운 상황이었음.
후에 원나라의 황제가 되는 쿠빌라이에게 그 당시 아직 황제로서의 지위가 확고하게 정해지지 않은 상황에서 고려의 자발적 투항이라는 사건은 쿠빌라이에게 계승분쟁에서 명분의 확보에
쿠빌라이 치세의 몽골제국과 그 주변세계에 대한 생생한 증언이자 이 위대한 시대가 남긴 지워지지 않는 기념물이다.
15세의 마르코가 베니스의 집을 떠나 41세의 나이에 다시 고향으로 돌아올 때까지 그는 몽골제국의 세계에서 거의 벗어날 수 없었다. 귀향길에 오른 그는 동남아시아와 수마트라
쿠빌라이가 즉위한 이후 안무고려군민총관부(按撫高麗軍民總管俯)를 설치했다. 쿠빌라이는 또 고려, 여진 , 한군(寒軍), 만호부(萬戶俯)를 증설했다. 이 두 기구는 모두 요양과 심양 일대에 두었다. 주로 고려인의 이민 사무를 관장했다. 1296년 상기의 두 기구를 하병하여 심양등로안무고려군민총관부로
제국은 정복 전쟁을 통해 편입된 영토와 백성을 자식들에게 분봉해 주는 봉건제 형태 유지.
형제간의 권력 다툼으로 몽케 사망, 쿠빌라이의 지위 계승 후 몽고제국 분열
쿠빌라이의 활동- 1267년 대도 (지금의 북경)로 천도,1271국호 대원 이라 칭함, 남송을 멸망시키고 전국을 통일, 중원의 패자가 됨.
쿠빌라이에 이르는 70여년 동안 유럽과 아시아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정복하였다.
이 중에서 우리가 현재 중국의 왕조 중 하나로 알고 있는 원을 세운 사람은 세조 쿠빌라이이다. 그는 칸의 자리에 오른 후 수도를 몽고 내륙에서 대도(大都, 지금의 북경)로 옮기고 국호를 바꾸었다.(1271) 우경윤, 『(
쿠빌라이칸[世祖]이었다. 그는 형 몽케칸[憲宗]를 계승하려 하였던 막내동생 아리크부카를 제거하고 북방의 초원에 웅거한 유목봉건세력의 진출을 막아, 수도를 몽골 고원의 카라코룸에서 화북(華北)에 가까운 상도(上都)와 화북 안에 있는 대도(大都:北京)로 옮겨 화북의 건조농경지대를 중심으로 한
쿠빌라이칸[世祖]이었다. 그는 형 몽케칸[憲宗]를 계승하려 하였던 막내동생 아리크부카를 제거하고 북방의 초원에 웅거한 유목봉건세력의 진출을 막아, 수도를 몽골 고원의 카라코룸에서 화북(華北)에 가까운 상도(上都)와 화북 안에 있는 대도(大都:北京)로 옮겨 화북의 건조농경지대를 중심으로 한
쿠빌라이칸이었다. 그는 형 몽케칸를 계승하려 하였던 막내동생 아리크부카를 제거하고 북방의 초원에 웅거한 유목봉건세력의 진출을 막아, 수도를 몽골 고원의 카라코룸에서 화북에 가까운 상도와 화북 안에 있는 대도로 옮겨 화북의 건조농경지대를 중심으로 한 중국식 집권적 관료국가의 확립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