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자는 사람이 어떠한 환경에서 자랐든지 그들이 배움을 통해 지식적, 지혜적 능력을 키운다면 그도 군자가 될 수 있다고 믿었다. 실제로 그의 제자들 중에 미천한 자도 공자에게 가르침을 받아 도덕적, 정치적으로 탁월한 인간이 되어 사회를 올바르게 하기 위한 정치적인 역량을 발휘하기도 했다.
맹자,중용 의 사서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고 여겨진다. 사서와 조직 행위론을 연계하여 분석, 고찰함으로써 동양과 서양을 막론하고 인간에 대해 중시하는 원리가 무엇인지 살펴보고, 양 사상이 충돌하는 부분에서는 그 것의 원인 등을 고찰하여 우리 사회의 특성에 어울리는 논리로 이해함으로써 동
인간 중심의 경영을 강조하는 현대 경영현장에 많은 시사점을 제공해 줄 수 있으며, 유교의 여러 가르침은 경영현장에서 응용되고 있다.
유교는 2,000년 가까운 기간 동안 우리 삶에 많은 영향을 미쳐왔다. 오늘날에도 한국인의 가치관 사고 방식 기저에 유교 사상이 깔려있다. 이러한 사실을 고려
맹자에서와 같은 선을 향한 도덕적 경향성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한다. 이는 우리가 보통 자연과학적 인식, 혹은 경험적 인식과 관련하여 사용하는 오성 혹은 이론이성의 개념으로 순자의 知 개념을 해석하는 것이다. 그런데 기존의 연구자들은 이러한 知 개념이 일종의 도덕원칙을 인식하는 기능
1, 요약
맹자는 ‘전국시대에 태어나 그 시기에 제후들이 쟁탈하고 백성들이 고통을 겪는 원인이 인간이 사욕(私慾)을 방임하여 단지 사리(私利)만을 바라고 인의(仁義)를 잊은 데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맹자는 양혜왕에게 “왕께서는 하필 이(利)를 말씀하십니까? 또한 인의(仁義)가 있을 뿐입니다”
깊게 읽은 이유와 감상을 써보았다.
1. 맹자
-제 5장 맹자, 양혜왕 상, 110~111쪽
맹자가 살았던 전국시대 당시는 천하통일의 기운이 한창 무르익기 시작할 때였다. 열국의 군주들이 모두 자국을 중심으로 한 천하통일의 대업을 이루기 위하여 부국강병에 박차를 가하던 시기였다.
-이하 본문 생략-
왕도정치를 부르짓었던 것이다.
전한사람인 사마천의 <사기>에 의하면, 양혜왕35년 을유에 비로소 양나라에 이르렀다고 기록되어 있으니, 맹자의 유세는 양나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한편 제나라에서 시작되어 양나라로 옮겨갔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왕도정치의 핵심이
맹자가 태어나 활약했던 시대에는 중국 역사상 전국시대(BC 481~221)라고 불리는 난세가 도래하게 되었다. 상황이 이러했기 때문에, 제후들에게 개인적 덕행과 선정을 강조한 맹자의 가르침은 소귀에 경 읽기와 같은 형국이었다. 비록 자신의 원칙이 주의를 끌지 못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맹자는
왕도(王道)를 역설하는데 소명을 가지고 있었다.
공자의 제자 맹자는 공자보다 훨씬 인간의 타고난 선한 본성을 강조했다. 맹자 역시 공자와 마찬가지로 여러 나라를 순회하면서 통치자들에게 덕으로 나라를 다스릴 것을 당부했다.
공자와 맹자는 유교의 가르침을 전수한 두 기둥으로 유교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