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을 통해 끊임없이 현실화되는 하나님의 결정적인 계시로 여기는 동일한 태도(sola scriptura)를 가졌던 것이다.
제1장 구원을 찾는 한 수도사
1. 루터의 개혁적 발전
1483년 에이즈레벤에서 본래 농부 출신인 한 광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루터는 유명론의 보루였던 에르푸르트 대학에서 학문을
이 보고서에서는 우선 루터의 종교개혁이 일어나게 된 배경을 시작으로 왜 종교개혁에서 그치지 않고 문화적 개혁으로까지 이어지는가에 대한 과정 조사가 중간 부분을 장식하고, 마지막으로 르네상스와 함께 근세의 태동기를 장식했던 종교개혁이 가져다 준 근세적 웃음이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해
중세로 근대로 넘어가는 격변의 시기인 16세기 초반에서 17세기 중반까지는 종교 전쟁의 시기라 할 수 있다. 1517년 루터의 종교개혁을 필두로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이 체결되기 까지 신교와 구교로 나뉘어 유럽은 무수히 많은 피를 흘렸다. 중세를 떠받치는 중요한 축인 로마교회의 약화와 타락은 개혁
종교개혁은 충분히 조명되어져야 할 역사적 사건이며, 역사를 탐구하는 역사학도라면 한번쯤 고찰해 보아야 할 것이다. 나는 여기서 종교개혁이 일어나게 된 역사적 배경들을 살펴보고 종교개혁의 전개를 루터와 칼뱅을 중심으로 이야기하면서 우리 역사학도들의 종교개혁에 대한 이해를 돕고자 한다
것이 아니라 교회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한다는 것이다. 그들의 최대의 강조점은 신자의 공동체로서의 무형교회가 아니고 신자의 어머니(mater fidelium)로서의 유형교회에 있다. 종교개혁은 이 같은 로마 카톨릭교회의 교회론과 결별하면서 다시 한 번 영적 유기체로서의 교회에 주목하였다.
루터의 생애와 그 시대의 배경을 살펴 볼 텐데 그 가운데서 “그는 왜 종교개혁을 일으킬 수밖에, 혹은 그는 왜 종교개혁을 일으키게 되었는가?”라는 질문을 던져 보고 대답해 보자. 덧붙여 루터의 개혁을 통해 우리가 배울 점과 과연 한국 교회의 실정에 적용 될 수 있으며, 있다면 어떻게 '적용' 될 수
종교개혁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과 성령의 새롭게 하시는 역사와 별도로 교회가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구속론과 성령론을 교회론 보다 앞서 논의하는 것이 논리적이라는 사실을 강조했다.) 이와 같이 종교개혁자들은 그리스도 중심으로 교회론을 이끌어 나갔던 것이다. 특별히 루터와 칼빈은 종
종교개혁은 이탈리아에서 일어난 문예상의 르네상스, 서부 유럽에서 일어난 정치적 르네상스를 배경으로 해서 발생한 마지막 단계의 르네상스라는 의미를 갖는다. 이탈리아의 인문주의운동은 서부유럽의 기독교적 휴머니즘으로 발전하여 기존의 교황중심의 체제에 대한 비판을 통하여 종교개혁의 이
루터가 불려 갔을 때, 그는 결코 혼자가 아니었다. 세속당국은 민중봉기가 두려워 로마의 종교재판에 넘기기를 거부하고, 그에게 다시 한 번 철회의 기회를 주기로 결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위험의 경고를 듣고서도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기 위하여 갔다.
1521년 4월 17,18일 양일에 루터는 국회
종교개혁을 유발시킨 직접적 계기는 1514-1517년에 결처 진행된 면죄부 판매였다. 면죄부를 산 사람은 죄를 사하고, 신의 은혜로 말미암아 연옥행을 면할 수 있다는 등의 허무맹랑한 교리에 대하여 루터는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 교회 문에 95개 조항에 달하는 반박문을 게시함으로써 본격적인 종교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