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강행실도·팔도지리지·석보상절·의방유취 등 귀중한 책을 간행하고, 경제육전을 반포하여 농업을 크게 장려하여 전제와 세제를 정비하였다.
그리고 세종대왕은 과학의 진흥을 위해 힘썼다. 세종대왕은 국민을 위하여 농업을 진흥하려는 데 뜻을 두고 한 평생을 천문, 지리 등 과학기술을 연구 보급
삼강행실도>, 옛고려의 역사를 배워 오늘의 거울로 삼고자 만든 <고려사>, 농사를 장려하고 농사법을 개량하기 위해 지은 <농사직설>, 군사를 길러 국방을 튼튼히 하기 위한 <역대병요> 등이 있었고, 지리서로 <팔도지리지>를 펴내 행정 구역의 체계를 세웠으며, <향약집성방>과 <의방유취>를 펴내 의술을
삼강행실도을 만들고 ,대표 법을 뽑아 이두문자로 만들어 백성에게 나누길 바란다. 이것은 바로 현 민주주의 이념인 모든 사람들이 생명을 존중받고 인권을 보장받는 조선이 되어 모두 문화인으로 거듭나길 바라는 세종의 마음 이었던 것이다. 결국 백성을 문화인으로 만들기 위해선 쉬운 말을 만들어
삼강행실도나 예법서 같은 것처럼 목민관으로써 목민을 다스리는데 반드시 알아야 할 내용을 다루고 있는 것으로 올바른 목민관으로써 지녀야할 가치관 사상 등이 수록되어 있을 만큼 아주 세부적이고 구체적인 내용들로 이루어져 있다
목민심서는 서문에 해당하는 자서를 빼고, 부임에서부터 해관
삼강행실도와 칠언 당음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나이 열세 살 되던 해에 주군의 부르심을 받았기에 부모님과 이별하고 형제들과 떨어져 궁중에 들어왔답니다.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을 떨칠 수 없어 매일 흐트러진 머리와 때 묻은 얼굴로 남루한 옷차림을 하여, 보는 사람이 더럽게 여기도록 하고
아주 안정적이었고, 백성들의 반응도 매우 좋았다.
또한 흩어져 버린 서적들을 수습한 일도 있었다. 대표적으로 『동의보감』과 『동국신속삼강행실도』가 있는데 <동의보감>은 전쟁으로 인한 굶주림과 전염병 때문에 인구가 줄어들고 있던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간행되었다. 귀양 중이던 허준의
삼강행실도’를 만들었는데, 그림을 먼저 내세우고 한문 기록은 뒤에 놓았다. 이는 글자를 몰라도 그림으로 이해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세종은 이때부터 백성들을 교화하기 위한 문자의 필요성을 절감했을 것이다.
훈민정음은 글자를 모르는 백성들을 위해 배우기 쉽고 쓰기 편하게 만들어졌다. 정인
유교의 왕도정치를 천명하며 역성혁명을 완성해 나갔다. 이후 한글의 보급은 유교의 지배규범으로써 일반 서민층으로까지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더불어 여성의 행실에 관한 규범이 상세해지고 강화되어 졌다. 삼강행실도, 내훈, 여계 등을 지침으로 내외법, 남녀칠세부동석, 정절 등이 여성들에게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의 <효자도(孝子圖)>는 효행담을 집대성한 것이다. 효사상은 시대와 이념에 따라 그 내용이 다소 변화되기도 하나 부모를 공경하고, 그 뜻을 받들어 섬기며 봉양한다는 본질에서는 차이가 없으며, 인륜의 가장 으뜸되는 덕목이다.
[효]
<효경>의 첫머리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