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엄종·자은종·중신종·시흥종’ 등 7종을 선·교 양종으로 폐합한데서 비롯되었다.
을 통합해서 〈조선불교조계종〉으로 이름 지었던 것을 고쳐 〈대한불교〉로 이름하고 각도에 종무원(종교적 사무를 관장하는 곳)을 두며 서울 태고사(전 31본산의 총본산)을 종무원중앙총부로 하였다.
2.5.2 천주
것이다. 이에 오랜 꿈에서 깨어났음을 느끼고, 깨달음을 얻은 원효는 결국 유학을 포기하고 ‘모든 것이 마음에 달려 있다’는 스스로의 깨달음을 실천해 나가기 시작한다. 인식이 존재를 귀존하고 인식 속에서 존재함을 깨달은 것이다. 반면에 의상은 다시 당나라로 향해 화엄종 체계를 배워온다.
화엄종이 주류를 이루었던 영남지역에 비해 진표율사의 미륵신앙과 당을 통해 들어온 새로운 불교종파인 선종 등 신라 지배세력과 상이한 불교적 흐름도 백제계 석탑 조성에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3) 조형특성
백제시대에 건립된 석탑은 2기만 현존할 뿐이며, 신라의 통일로 인하여
1.선종불교의 의미와 변천
화엄종(華嚴宗) ·법상종(法相宗) 등 교학(敎學)을 중시하는 교종(敎宗)에 대하여, 직관적인 종교체험으로서 선(禪)을 중시한다. 원래 선종은 석가가 영산(靈山) 설법에서 말없이 꽃을 들자, 제자인 가섭(迦葉)이 그 뜻을 알았다는 데서 연유한 것으로, 이심전심(以心傳心) ·불
화엄종이 성립되고 또 민중의 종교인 정토신앙이 성하게 되는 것은 중대한 사실이 아닐 수 없다. 여기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통일 전의 신앙은 현세적인 경향이 강했고, 통일 후에는 도피적이고 내세적인 경향이 강하였다. 또한 통일 전에는 귀족 특히 왕실 중심의 불교로서 신라에서는 소위 불교왕명
Ⅰ. 머리말
신라 말기 선종의 유행은 골품제의 모순, 지배층의 부패 등으로 쇠퇴 일로에 놓여 있던 신라 하대 사회의 붕괴를 촉진시키면서 새로운 고려왕조의 건립에 능동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는, 교학 불교의 논리를 부정하고, 초월하려 했기 때문에 화엄종이나 법상종 사상과는 근본적으로 다르
화엄종이 정립되고 있었다.
의상은 중국 불교 교학을 집대성한 지엄의 문하로 10년에 가까운 시간을 배움에 투자를 하고 화엄에 대한 배움을 총망라하여 일승법계도를 저술하기에 이른다.
신라로 돌아온 의상은 그의 출가 본사 이기도 한 황복사(皇福寺)를 중심으로 제자들을 이끌며 화엄교학을
화엄종의 성쇠와 궤를 같이 하여 고려 후반 이후로 사세가 기울어져 갔을 것으로 짐작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 따르면 조선 초기까지도 폐사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또 《호산록(湖山錄)》을 참조하면 보원사의 사우는 모두 없어지고 비석, 탑, 철불 1좌만이 남아 있었는데 1920년 조선총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