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게 됨으로서 불교가 백성들 사이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 만일 인물로서 두 시기를 구별하는 표식을 삼는다면 자장은 통일 전 불교의 집대성자요 원효는 통일 후 불교 개척의 선구자라 할 수 있겠다.
고구려 불교사상의 주류는 반야공사상의 천명에 주력한 삼론종계통이었는데, 고구려 요동출
원효대사(元曉大師)을 선택하였다. 불교에서의 덕 교육론의 관점은 다양하게 제시되는데, 초기 불교에 근거해서 논의할 때 가장 유의미할 것으로 생각된다. 석가는 도덕적 생활이란 진리를 통한 숭고한 삶을 추구하는 데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삶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덕의 함양, 감각의 조절,
원효는 향언으로서 당시 사람들은 향언으로 새벽이라고 불렀을 것이다. 그리고 요석공주와의 법연 이후로는 스스로 소성거사 또는 아래 하(下)자 마저 윗부분을 떼어버린 복(卜)자를 붙여 복성거사라고 불렀다 하며, 고선사 서당화상탑비에 의하면 원효의 별칭으로 고선대사, 만선화상이 있었으며, 구
Ⅰ.원효사상의 생애원효의 성은 설이요. 그의 아버지는 담내내말이며 좀는 잉피공 또는 적대공이라고 한다. 고향은 압량군 불지촌이다. 신가 제 26대 진평왕 39년에 태어났다. 어릴 적 이름은 서당이고 어려서부터 매우 영민하여 15세 이전에 세속의 학문을 통달하였다. 당시 유행하던 불법을 배우고
사상을 새로 들여온 의상에게 부석사를 중심으로 교단체제를 이루어 가도록 지원했던 것이다.
그 후 의상은 부석사를 중심으로 태백산과 소백산의 천연동굴이나 초려에서 제자들과 화엄사사상을 연마해 나갔다. 또한 원효와의 교류도 이어나가면서 상호교류를 통하여 각자의 사상체계를 정비해 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