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1. 신라말기(후삼국 시대)의 왕건, 견훤, 궁예
1. 궁예
정치적 감각: 구고구려계 지방 세력을 자신의 영향권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옛날에 신라가 당에 청병하여 고구려를 멸망시켰기 때문에 평양 옛 서울이 황폐해져서 풀만 무성하니 내가 반드시 그 원수를 갚으리라.”고 말하는 등 고구려 부흥 주
Ⅰ. 연구 목적
과거는 미래의 거울이라는 말이 있다. 이는 미래를 알고자 한다면 과거를 먼저 알
라는 뜻으로서 역사 인식의 중요성을 인식시켜 준다. 찬란한 미래는 자기 스스로가 건설하고 끊임없는 노력의 결과에서 비롯된다. 그러므로 속해 있는 민족 공동체의 지나온 발자취를 알고, 밝히는 일은
초기
중국 유학후 수도처로 삼아 안주하다가 뒷날 거대한 사찰을 이룬 곳이다. 그러나 부석사의 생김을 정리한 역사적 기록물은 거의 남아있지 않고 비석에 쓰인 몇 문자나 절을 재건한 기록, 보수한 기록 등만이 전한다. 부석사가 세워지기까지에 관해 '삼국사기'에는 고승 의상이 임금의 뜻을 받들
Ⅰ. 인간의 근원을 탐구하는 논문(원인론)
대체적인 줄거리는, 종밀 선사가 인간의 근원에 대한 탐구를 함에 있어서, 다른 사상에서 얘기하고자 하는 방편적인 내용을 넘어서서 그리고 불교의 사상 내에서도 방편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교를 넘어서서 진정한 본원을 찾고자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각훈(覺訓)
1) 각훈에 대해
각훈(覺訓)은 12세기 후반에서 13세기 전반에 걸쳐 살다간 고려 중기 화엄종 불교 화엄경을 근본 경전으로 하여 세운 종파. 우리나라에서는 신라 때 의상(義湘)이 개종(開宗)하였으며, 뒤에 교종(敎宗)이 되었음.
고승이다. 그의 생애에 관한 기록이 거의 없어 정확한 생몰년은
화엄종과 법상종의 교세가 크게 일어 난다. 불교가 국교인 고려의 정치는 불교와 지나치게 유착되었고 현종은 부왕의 원찰인 현화사를 세워 법상종을 본산으로 했고, 문종은 흥왕사를 세워 화엄종을 본찰로 한 사실들을 보면 고려불교의 성향을 짐작할 수 있다. 의천이 태어나활동 하던 이 시기에는 특
화엄종이 도입된 것은 신라시대로, 신라 통일 직전 의상(義湘, 625~702)이 661년 당나라 종남산에 가서 화엄종의 시조인 지엄(智儼)으로부터 화엄학을 배우고 문무왕 10년(670)에 귀국하여 영주에 부석사를 창건한 데서 시작되었다. 이것이 계속 내려와 고려 광종대에 와서 화엄종을 중심으로 교종을 통합하
화엄종 같은 교종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이러한 이유에서 균여는 신라의 화엄종과 향가를 고려의 것으로 계승하는 역할을 맡은 인물이었다.
③ 한시의 발전과 향가의 쇠퇴
고려시대에도 한시와 향가의 이원성은 유지되었다. 한시는 귀족 상호간의 정감 전달방식으로 사용되었고, 행가는 귀족과 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