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熊川縣)에는 산이 무너져 압사한 자가 네 사람, 익사자가 여덟 사람입니다.’
(‘성종실록’ 21년 7월 23일)
첫 번째 ‘성종실록’은 사헌부 대사헌 서거정의 상소이고 두 번째 자료 역시 조선왕조실록에서 발췌한 자료로 이상기후에 대한 성종의 깊은 탄식이다. 또한 마지막 자료는 경상도 관찰
조선시대에 수많은 유능한 선비들을 잃은 사건이다. 먼저 조선시대의 왕실을 간략하게 알아보고 거기에서의 사화를 요약하고 난 뒤 사화중에서도 4대사화로 꼽을 수 있는 무오사화, 갑자사화, 기묘사화, 을사사화에 관해 연구해보았다. 연구방법은 조선왕조실록과 인터넷 자료를 주로 이용하고 인물에
조선후기 의식수준을 함께 고려했으며, 조선후기 실상에 최대한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다양한 자료를 활용했다. 설화(說話)와 같은 이야기는 『한국구비문학대계(韓國口碑文學大系)』에서 추려냈으며, 홍경래의 난을 일으킨 주동자를 잡아 심문한 『관서평란록(關西平亂錄)』과 『조선왕조실록(朝鮮
조선 시대에 대해 가지고 있는 사전 지식으로는 이전 고려 시대와 같은 자유연애가 존재하기 힘든 사회였다. 자유연애는커녕 혼인 전에는 상대방의 얼굴도 알지 못한다고 알고 있다. 따라서 사대부들이 기록한 정사나 기록에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가 남아 있을 리 없다. 방대한 <조선왕조실록>에도 율
조선왕조실록》에는 병조 의흥부(兵曹義興府)에서 수박희로 인재를 시험하여 방패군(防牌軍)으로 뽑되 세 사람을 이긴 자를 채용했다는 기록이 있고, 나라에서 수박희로 시험을 보아 군사를 뽑는다는 소문을 듣고 이방 향리(鄕吏)의 관노(官奴)들이 모여 수박희의 경기를 가졌다고도 했다. 《무예도보
실록 지리지에 따르면 인천 서쪽 15~19리에 둘레 250보의 성이 있어 제물량, 제물포영, 제물진으로 불렀다고 한다. 1656년 효종 7년에는 월미도에 처음 관사를 짓고 행궁(行宮)이라 불렀다고 한다. 이후 월미도라는 지명이 처음 등장한 것은 1708년 4월 21일자 조선왕조실록으로 그 이름의 기원에 대해서 정확
조선왕조실록에는 ‘일본통신사(日本通信使)’라고 그 명칭이 나오며 ‘조선통신사’는 일본학자들이 주로 사용한 용어라고 한다.
통신사로 규정할 수 있는 원칙을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조선국왕으로부터 일본쇼군에게 파견되어야 한다. 둘째 쇼군에 대한 길흉조사, 또는 양국 간의 긴급한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유구국 중산왕이 자신이 신하로 일컬으며 태조에게 예물을 받쳤다라는 기록이 있으며 빈번히 조선에 조공을 받쳤다. 유구는 또한 중국에도 빈번히 조공을 받쳐왔는데 이러한 조공의 예에 대해 중국 측은 국왕이 즉위하면 그로부터 2~3년 후에 책봉사절을 보내어 국왕 취임을 인
조선은 어땠을까? 도덕성 강조를 위해서라도 무기소지를 애초에 금지하지 않았을까? 처음엔 그런 생각으로 무기 소지 금지령에 관련된 자료를 찾아보려고 하였다. 그런데 정작 뚜껑을 열자, 의외로 이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 그래서 조선왕조실록을 뒤져 보았으나, 특별하게 칼의 소지를 금지한다는 말
자료의 한계상 국가정책과 천민의 인식 관계를 파악함에 있어 일부는 추측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는 점이다. 특히,「조선왕조실록」에서 참고한 역대 군주별 천민 언급횟수는 단순한 언급횟수를 가지고 국가가 천민에게 취한 정책적 의미로 확대해석하였고 이에 상당한 추측을 적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