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임하였다. 남조선노동당 등의 국내파와 연안파 등을 숙청하여 권력체제를 구축하였다. 1994년 7월 8일 심근경색증으로 사망하였다.
2. 북한내 정치권력 투쟁 과정
입북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나 소련군의 후원하에 급부상하고 있던 김일성 중심의 만주파 세력은 서울의 박헌영 중심의 조선공산당
김일성은 체포되어 약 반년간 감옥살이를 하게 된다. 석방된 후 중학교도 마치지 못한 김일성은 일제 침략자들과 친일 부역자들을 타도하고 자신이 처해 있던 세계보다 정의롭고 더 좋은 세계를 쟁취하기 위하여 만주의 한 빨치산 부대에 들어간다.
2. 항일 빨치산 운동과 88여단 시절
빨치산 부대에
4. 정세에 관한 김일성의 판단
이들이 방문을 마치고 돌아온뒤 남과 북에서는 공산당과 좌익계정당의 합당작업이 전격적으로 추진된다. 북에서는 북조선공산당과, 조선 신민당 남에서는 조선공산당과 남조선 신민당 , 인민당의 합작이 모색됐다. 좌우합작 막판 절충에서 김일성은 김일성대로 좌우합
김일성 일인체제의 완성과 동시에 이루어졌으며 결국, 1948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의 인민민주주의적 성격과 집단지도제적 권력구조는 1972년 헌법에서 각각 사회주의적 성격과 주석중심의 일인지도제적 권력구조로 변경되었다.
1972년 개정된 헌법은 북한이 사회주의국가임을 명시하고(
1. 연표
∙ 1946년 3월: 토지개혁 실시 결정
- 김일성이 토지개혁에 대한 총괄을 하였고 국내적 의의로 “북조선 민주주의의 기초가 될 뿐 아니라, 또 전 조선민주주의 건설의 기초가 된다”고 선언함
- 당은 총력을 기울여 토지개혁에 착수하였고, 토지개혁을 통해 당원 수뿐 아니라 당의 위신도 비
김일성은 1956년 이전까지는 자신이 내각에 있으면서 주로 행정 사업에 집중하였기 때문에 당 내부 사업에 미처 “머리를 쓸” 사이가 없었다고 설명하였다. 세종연구소 북한연구 센터, 『북한의 당·국가기구·군대』 (도서출판 한울, 2007), 46쪽
여기서 김일성이 언급하는 1956년은 조선인민군 내 조직
북한의 인사등용에 있어 가장 우선적이고 기본적인 원칙인 충성심에 있어 가장 믿을 만한 세력이 바로 이런 친인척 인물이라고 판단한 데에서 기인한다. 다만 친인척 등용에 있어서 아버지인 김일성과 다른 점이 있다면 직계존비속을 제외한 다른 친인척에 대해서는 철저한 감시와 통제가 뒤따랐다는
북한 주민의 ‘정치·사상적 성분’파악, 종파투쟁의 지방차원에서의 마무리를 목적으로 했다. 중앙당 집중지도사업으로 주민은 ‘혁명적 요소’, ‘반혁명적 요소’, ‘중간층’으로 분류되었는데 반혁명적 요소는 숙청 또는 감시의 대상이 되었다. 반혁명적 요소의 적발은 자수와 신고를 바탕으로
김일성이 주체를 논한 것은 1955년의 일이며, 사상에서의 주체라는 용어는 1963년으로 기록되어진다. 이후 김일성과 관계가 소원하던 황장엽이 1970년에 본격적으로 사람과 인민대중을 모든 세계관의 중심이라고 보는 주체철학을 완성하였던 것이 점차 북한식 김일성 유일 통치사상으로 변질되었던 것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