눌재집 訥齋集〉 연보(年譜)에 박상(朴祥)이 48세(1521)에 "왕양명의 전습록을 변론한다"고 한 것이 있고, 김세필(金世弼)도 〈십청헌집 十淸軒集〉에서 "양명 노선생이 심학을 다스렸다"고 했으니, 이를 볼 때 양명학이 우리나라에서 전해진 것은 1521년이 된다. 이해는 왕수인이 50세로 강서(江西)에 있었
눌재집(訥齋集)>에 있는 「서적십사(書籍十事)」라는 글을 보면, 활자로 찍어내는 경우에 인출이라는 말이 네(4)번이나 나온다.
≪ … 중 략 … ≫
Ⅲ. 기록과 의무기록
의무기록은 환자와 질병에 관계되는 모든 사항과 병원이 환자에게 제공해 준 검사, 치료 및 결과에 관한 사항
눌재집과 김세필의 십청헌집을 근거로 제시하면서 양명학의 전래시기를 1521년 이전으로 추정하고 있다. 어쨌든 양명학이 조선에 전래될 무렵 학문적 풍토는 주자학 일변도였으며, 또한 그것이 통치 이데올로기의 지위를 점하고 있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따라서 양명학이 조선에 전래되었다 할 지라
눌재집 訥齋集〉 연보(年譜)에 박상(朴祥)이 48세(1521)에 "왕양명의 전습록을 변론한다"고 한 것이 있고, 김세필(金世弼)도 〈십청헌집 十淸軒集〉에서 "양명 노선생이 심학을 다스렸다"고 했으니, 이를 볼 때 양명학이 우리나라에서 전해진 것은 1521년이 된다. 이해는 왕수인이 50세로 강서(江西)에 있었
◎ 양명학의 배경
14세기 몽고(元) 통치의 점차적인 쇠퇴는 황족 내의 분열에 의해 촉진되었으며, 1340년대의 반란과 1351년에서부터 1353년에 이르는 여러 중요한 반란 등은 원元의 패망을 재촉하였다. 한편 1333년이래 15년간 빈번히 일어난 기근은 황하의 범람에 의해 절정에 이르렀다. 홍수와 기근은 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