四庫全書)』, 생각의 나무, 2009, pp 49~50.
즉위 첫해, 건륭제는 각 성(省)의 재정을 맡은 관리인 포정사(布政使)들에게, 정부의 후원을 받아 완성된 모든 학술작품들의 필사본들을 인쇄하여 각 성의 서점에 배포하라고 명령했다. 2년 후, 정부의 찬조 아래 완성된 학술작품을 사설출판업자들이 다시 출
정조의 문체반정
1. 정조(1776-1800)는 “보지 않은 서적이 없다”고 평가될 정도로 명말이래 중국의 학술과 문학에 정통하였다. 즉위전 <<浙江書目>>을 입수하여 체계적으로 북경의 서적을 수입하였으며, 즉위 후 <<四庫全書>>를 구입하기 위해 사신을 파견했다가 대신 <<古今圖書集成>>을 구입하였다. 현전
四庫全書)》 등 대규모 문화사업이 이루어졌다.
고증학은 중국학술사상의 정점이었으며, 근대과학사상의 싹도 보호·육성되었으나, 곧 그 비실천성으로 인하여 선종 이후 중국사상의 위기 속에서 경세를 중시하는 공양학파(公羊學派;近文學)인 캉유웨이·량치차오 등이 변법자강의 실체운동을 불러일
四庫全書)》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 [張之洞] 등이 나타나서 송학(宋學)을 재흥시켰다. 그들을 중심으로 하여 수행된 양무운등의 편찬이 잇따라 이루어졌다.
고증학은 중국 학술사상의 한 정점이었다. 또한 근대과학정신에 대한 싹도 보호 육성되었으나, 곧 그 비실천성에 대한 비판은, 도광
四庫全書)》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 등의 편찬이 잇따라 이루어졌다. 고증학은 중국 학술사상의 한 정점이었다. 또한 근대과학정신에 대한 싹도 보호·육성되었으나, 곧 그 비실천성에 대한 비판은, 도광제(道光帝) 이후 청왕조의 쇠퇴와 중국 전체의 위기 가운데서 공양학(公羊學)의 발흥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