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의 문체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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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정조의 문체반정
1. 정조(1776-1800)는 “보지 않은 서적이 없다”고 평가될 정도로 명말이래 중국의 학술과 문학에 정통하였다. 즉위전 을 입수하여 체계적으로 북경의 서적을 수입하였으며, 즉위 후 를 구입하기 위해 사신을 파견했다가 대신 을 구입하였다. 현전하는 규장각의 중국서적의 많은 부분은 정조때 수입된 것이다.
정조는 규장각을 설치하고 抄啓文臣을 선발하여 경전과 역사에 관한 강의를 주도하였다. 그가 남긴 는 경학과 역사 문학에 대한 당대의 쟁점을 요령있게 파악하고 잇는 최고의 학자였음을 입증해주고 있다. 당대에 유행한 신문체의 문제를 인식한 최초의 인문이기도 하다.
2. 정조 16년 글쓰기에 대한 권력의 검열 - 문체반정(문체를 순정한 상태로 복귀시킨다)
이 사건은 천주교의 전파가 촉발된 것인데, 왕은 천주교보다는 사대부의 문체에서 원인을 찾았다.
1784년(정조8)정조는 “명청이래 문장은 險怪하고 尖酸함이 많아 나는 보고 싶지 않다. 요즘 사람들은 명청인의 문집을 보기를 좋아하는데, 무슨 재미가 있는지 모르겠다. 아니면 재미가 있는데도 내가 그 재미를 알지 못하는 것인가?”라 하였다. 정조는 신문체의 유행에 대해 우려를 표명하고 있었다. 하지만 물리적 통제는 없었고 그럴 의도도 없었다.
1785년 秋曹적발사건(이승훈, 정약전, 정약용, 이벽 등 남인의 자제들이 중인 김범우의 집에서 천주교의 교리를 토론하고 의식을 거행하다가 형조(秋曹)의 禁吏에게 적발된 사건)은 학적 호기심의 대상으로 머물렀던 서학이 신앙으로 전환한 중요한 사건이다.
주자학을 대신할 새로운 이데올로기로 부상한 이 이질적 종교는 체제의 입장에서는 너무나 당혹스러운 것이었다. 하지만 정조는 이 사건을 축소하여 덮어버렸다. 곧 적발된 인물들은 남인들이었고, 이 시기 정조는 남인을 정권에 참여시키고 있었다. 남인을 치죄하면, 정조가 의지하고 있던 남인 정권의 축이 무너진다. 정조는 이점을 우려했다.
대신 서적에 대한 탄압이 시작되었다. 문체반정의 서곡이 울린 셈이다. 정조는 이 사건이 중국에서 수입된 서적에 기인한 것이라 판단하여 1786년 1787년에 중국서적을 수입하지 말 것을 명령했다. 1788년 8월 3일 정조는 左道의 혹세무민이 천주교만이 아니라는 점, 더욱이 중국에서 陸學, 王學, 佛道, 老道의 종류가 있었지만 금령을 설치한 적이 없었음을 상기시키면서 천주교의 전파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룰 기회를 봉쇄했다.
하지만 1791년의 진산사건(진산군에 살던 천주교 신자 윤지충, 권상연이 조상의 신주를 불살라버린 사건)은 덮어버릴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진산사건은 문체에 대한 정조의 정책의 전환점이 된다. 1791년 10월 19일 정조는 동지정사 박종악과 대사성 김방행을 불러들여 접견했는데, 이때부터 본격적인 문체반정이 시작된다. 정조는 문풍이 점점 비속해지고 있음과 科文에까지 패관소품의 문체가 침투하여 경전이 무의미한 것으로 전락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그는 문체 변화의 근거를 제공한 것은 중국서적이니 박종악에게 稗官小記는 물론 경전과 역사서라도 중국판은 절대로 수입하지 말 것, 귀국때 철저히 수색해 교서관에서 압수하여 유포시키지 말 것을 지시했다.
성균관 대사성 김방행에게도 “성균관의 시험답안지에 조금이라도 패관잡기에 관련되는 답이 있으면 전편이 주옥같을지라도 下考처리하고 이어 그 사람의 이름을 확인하여 과거를 보지 못하도록 하여 조금도 용서가 없어야 할 것이다”고 지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