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리우며 이이(李珥)의 성리학설(性理學說)을 계승한 일단의 학자들을 말한다. 이들이 주로 경기(京畿)와 호서(湖西)에 살았기 때문에 이황(李滉) 및 그의 문인들과 구별하여 기호학파라 하였다. 김장생(金長生)·김집(金集)·김창협(金昌協)·송시열(宋時烈)·송익필(宋翼弼) 등이 대표적인 학자이다.
宋時烈)의 화상은 그가 그린 것을 화공(畵工)이 전사(轉寫)한 것이라고 한다. 1721년 (경종 1년) 신임사화(辛壬士禍) 신임사화 : 이미 숙종 대에 노론과 소론이 분기하여 사문(斯文)시비를 벌였으나, 경종 대 들어 왕통에 관한 시비가 본격화됨으로써 기존의 사문시비는 충역(忠逆)시비로 논지가 바뀌었다.
宋時烈) 등과 논쟁, 탄핵을 받고 삭직당했다. 1659년 남인의 거두로서 효종의 장지문제와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문제(服喪問題)를 가지고 서인의 세력을 꺾으려다가 실패, 삼수(三水)에 유배당하였다. 치열한 당쟁으로 일생을 거의 벽지의 유배지에서 보냈으나 경사(經史)에 해박하고 의약 ·복서(卜
宋時烈) 등과 논쟁, 탄핵을 받고 삭직당했다. 1659년 남인의 거두로서 효종의 장지문제와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문제(服喪問題)를 가지고 서인의 세력을 꺾으려다가 실패, 삼수(三水)에 유배당하였다. 치열한 당쟁으로 일생을 거의 벽지의 유배지에서 보냈으나 경사(經史)에 해박하고 의약 ·복서(卜
宋時烈)의 사상을 신봉하고 특히 이이의 학설을 옹호하였으나 주리(主理) ·주기(主氣)의 양설을 모두 배척, 절충적 이론을 세웠다. 1882년(고종19)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선공감감역이 되고 그 후 강원도 도사(都事) ·장령 ·순흥(順興)부사 ·중추원참의 등에 보직되었다. 저서에 《간재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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