寒岡정구鄭毬의 질서가 되어 한강과의 접촉이 시작되었고, 그때 성주목사로 있던 허잠許潛이 한강에게 묻기를 "남방에서 호학하는 선비가 누구더냐"하니 "호학입지를 보아 이 사람이 훗날 우리의 사표가 될 만하다"하였다고 한다.
선조 28년(1595)42세 때 서애西厓 유성룡이 학행으로 천거하여 보은현
寒岡) 정구(鄭逑),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지산(芝山) 조호익(曺好益)과 같은 거유(巨儒)들과 교유하면서 성리학에 심취하였다.
51세 때에 용진(龍津)에 있는 사제(莎堤)로 한음(漢陰)을 찾아가 종유(從遊)하면서 그를 대신하여 <사제곡(沙堤曲)>을 지었고 <누항사(陋巷詞)>를 지어 자기의 곤궁한 생활
정구, 여헌 장현광, 지산 조호익과 같은 거유들과 교유하면서 성리학에 심취하였다.
51세때에 용진에 있는 사제로 한음을 찾아가 종유하면서 그를 대신하여<사제곡>을 지었고 <누항사>를 지어 자기의 곤궁한 생활상을 노래하였다. 57세 때에는 한강이 동래 온천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대구 검단동 금호
-도산서원-
퇴계 선생은 후학(後學)을 가르침에 있어 싫증을 내거나 귀찮아하지 않았으며, 친구처럼 대하여 끝내 스승으로 자처하지 않았다.
선비들이 멀리서 찾아와서 묻고 또 물으면, 그들의 정도의 깊이를 따라 일러주었으며, 반드시 뜻을 세우는 것[立志]으로 우선을 삼고, 주경(主敬)과 궁리(窮
노계 박인로의 생애와 문학세계
노계 박인로
승의부위 석(碩)의 아들인 박인로는 어려서부터 시재에 뛰어났으며,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의병장 정세아의 막하에서 별시위가 되어 무공을 세웠다. 이듬해 무과에 급제하여 수문장선전관을 지냈다. 퇴관 후 고향에 은거하며 독서와 시작에 전념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