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는 매우 풍요로워서 정철에 버금가는 작가로 알려져 있다. 그의 작품들은 3권 2책으로 이루어진 『노계집』과 필사본 등에 실려 있다. 그 밖에도 많은 시가들이 있었으나 대부분 소실되었다.
비록 시조를 즐겨 지어 완전히 생활화했지만, 국문학사상 의의는 가사가 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그
Ⅰ. 노계박인로의 개요
1. 출생
1561(명종 16)~1642(인조 20). 조선 중기의 문인이다. 임진왜란 때는 무인(武人)으로도 활약하였다. 본관은 밀양이다. 자는 덕옹(德翁), 호는 노계(蘆溪) 또는 무하옹(無何翁)이다.
영양 도천리(永陽 道川里 : 지금의 경상북도 영천군 북안면)에서 태어났다. 그의 시조는
박인로와의 교유를 용납한 이유를 단순히 박인로가 그의 신분적 처지를 극복하려고 보인 남다른 ‘양반 의식’이나 ‘유가 의식’으로만 설명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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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 누항사(노계박인로)의 작가
1. 출생
1561(명종 16)~1642(인조 20). 조선 중기의 문인이다. 임
국문학개론》, 景仁文化社, 1996, p.161.
이에 대해서도 여러 국문학자들의 견해가 있다.
조윤제(趙潤濟)는 “가사(歌詞)는 음악 곡조에 대한 가사와도 혼돈될 염려가 있으니까 가사(歌辭)라는 문자를 쓰고자 한다.” 趙潤濟,《朝鮮詩歌史綱》, 東光堂書店, 1937, p.236.
라고 말했다. 반면 ‘가사(歌辭)’
용어는 경기체가, 속요, 악장, 가사, 장시조 등, 가곡으로 불려지는 긴 노래를 모두 지칭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용어는 노래의 長短을 구별하기 위하여 쓰여진 것이다. 특히 지봉유설에 보면 악장과 경기체가를 모두 장가로 불렀다는 기록이 나오는 등 하나의 독립된 장르명칭으로 보기에는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