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약전
자는 덕회(德晦), 호는 여헌(旅軒)이다.
고려 상장군 금용(金用)의 후손이며 덕녕부윤(德寧府尹) 안세(安世)의 8대손으로 증 이조판서 열의 아들로 명종 9년(1554)에 인동 남산에서 태어났다.
7세때 글을 배우기 시작했고 8세 때 부친을 잃고 11세때 학자인 신당 정붕의 아들 정각(鄭慤)이 보고 "
(1) 영남가단의 개념
최초로 ‘가단’이란 용어를 쓴 것은 조윤제의 《한국시가사망》 중 《경정산가단》의 기록이다. 조윤제는 말하기를
「김천택 김수장이 평민계급에서 돌출하야 시가계에 중진적 존재가 되니 그들을 중심하야 일세의 가인 가객이 바짝 일어나 경정산에 운집하야 일대의 성
연구물로서의 가치가 높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더욱 호기심을 갖고 조사할 수 있었다.
처용가는 앞에서 말했듯이 민속 신앙적 관점, 불교 신앙적 관점, 무․불합적 관점, 역사 사실적 관점, 심리학적 관점 등 학자마다 다양한 관점을 가지고 해석하고 있다. 그 이유는 <처용랑 망해사>의 모호성
문인들이 학문적·도락적·파한적(破閑的)인 생활을 읊었기 때문에 귀족문학이라고도 하며, 따라서 국민문학으로 성장하지 못하고 일찍 소멸하였다.
그 형식에 관해서는 여러 설이 있으나, 대체로 기본형·변격형·파격형으로 나눌 수 있고, 음수율은 주로 3음절과 4음절로 되어 있다. 음보수(音步數)는
제1절 후기가사의 발생 배경
임․병 양란 이후 서민의 자아 각성에 의한 서민 의식과 산문 정신의 영향으로 종래의 관념적, 서정적 가사가 서사적(敍事的)으로 바뀌었다 굴욕적이고 처절했던 전란은 구국과 우국의 충정 어린 작품을 낳게 하였고, 이로 인해 음풍 농월식의 강호 한정이나 연군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