慶尙道의 성립
『慶尙道地理志』에 의하면 “고려 태조가 三韓을 통합하고 비로소 東南海道部署使를 두었다고 하였으며, 그 후에 慶尙晋安東道, 慶尙州道, 慶尙道 등으로 각각 고쳤으나 그 개칭의 연대는 미상이다”고 하였다. 그 개칭의 연대에 관해서 『世宗實錄』地理志에서는 대략 아래와 같이
Ⅰ. 경상북도
북쪽은 강원도와 충청북도, 서쪽은 충청북도와 전라북도에 접해 있으며, 동쪽은 동해에 면해 있다. 동쪽은 태백산맥, 북서쪽은 소백산맥이 자연적인 경계를 이루어, 전체적으로 하나의 큰 분지 모양을 이룬다. 전반적으로 농업인구의 비율이 높은 편이나 김천-구미-대구-영천-포항을 잇
慶尙道에서 三○名, 江原ㆍ平安道에서 各 十五名, 黃海ㆍ咸鏡道에서 各 一○名式을 뽑아 大科에 應試할 資格을 주었다.
이렇게 生進科에 及第한 사람으로 成均館을 거치지 않고도 大科에 應試할 資格을 賦與하여 總 二四○名이 大科에 應試할 수 있도록 人員을 定해 놓았다. 大科에 第一次 試驗을 初
慶尙道의 가랑잎』을, 연작시집 『어머니』를 간행하였으며, 수필집 『밤에 쓴 人生論』,『구름에 달가듯이』를 펴냈다. 이 무렵 다시 3인 공동시집(조지훈, 박두진, 박목월) 『靑鹿集以後』,『靑鹿集其他』를 펴내기도 하였다. 그리고 1971년『박목월 詩選集』을 간행하기도 했다. 1973년에는 이때까지
1501년(年) 경상도(慶尙道) 예안현(禮安縣) 온계리(溫溪里)의 8남매(男妹)의 막내로 태어난 이황(李滉)이 최고(最高)의 교육자(敎育者)로 인정(認定)받기까지는 어머니의 힘이 컸다. 이황(李滉)의 아버지 찬성공(功)은 이황(李滉)이 걸음마도 떼기 전(前)에 돌아가셨기 때문에 그의 어머니가 자식(子息)들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