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시대
(백제)
1. 익산 미륵사지 (益山 彌勒寺址)
사적 제150호. 전북 익산군 금마면 기양리 소재. 백제 무왕 때 세워진 사찰.
『삼국유사』에 의하면 백제 무왕 때 왕이 왕비와 사자사(師子寺)에 가던 도중 용화산 밑의 연못에서 미륵삼존이 나타났는데, 왕비의 부탁에 따라 이 연못을 메우고 3곳에 탑,
興輪寺)에 살게 하고 28명의 고승과 함께 역경에 종사토록 했다. 율부(律部)72권이 번역되자 담욱(曇旭)과 혜인(惠仁)이 律疏 36권을 저술한다. 겸익의 인도유학과 율부의 번역은 백제불교의 폭과 역량이 국제적인 것이었음을 일러준다. 백제불교는 계율을 중시했다. 율부의 번역과 주석이 그 대표적 사례
興輪寺)를 들 수 있다. 고대의 한국 사찰은 주로 시가지의 중심부에 건립되는 것이 상례였다. 이것은 중국이나 일본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시대상황과 사회적 여건에 따라 한국의 사찰은 수행이나 포교에 역점을 두는 특수성을 나타내기 시작하였고, 입지조건에 따라 각기 다른 특징을 나타내게 되었
석탑도 있다. 또한 신라의 풍속에는 매년 초파일부터 보름까지 도성(都城)의 남녀가 다투어 흥륜사(興輪寺)의 전탑을 돌았는데 이를 복회(福會)라고 부르기도 하였던 민속과도 연관된 탑파의 면모를 살필 수도 있다. 장충식 1989 <<韓國의 塔>> 일지사 p.9
. 이곳에 탑파 건립의 외형적 동기가 마련되었다.
때는 영탑사(靈塔寺) ·육왕사(育王寺) 등 많은 절이 건립되었다. 1937년 평양 청암동의 금강사지(金剛寺址)를 발굴 조사한 결과 5세기에 창건된 금강사지에는 남향으로 중문(中門) 안에 팔각목탑이 배치되고 동서(東西)에 2개의 건물터가 있으며 북쪽에 3개의 건물터가 동서로 나란히 배치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