萬言封事), 성학집요(聖學輯要) 등을 지어 국정 개혁안을 왕에게 제시했다. 1576년에 동인과 서인의 대립이 심화되자 그의 중재 노력이 실패하고 건의한 개혁안마저 묵살되자 낙향하여 본가와 처가를 오가며 격몽요결(擊蒙要訣)을 저술하고 후학양성에 힘을 썼으며 향약과 사창법을 시행하였다. 45세 때
萬言封事)에서 “소위 실공(實功)이라고 하는 것은 일을 이룸에 성(誠)이 있어서 공언(空言)이 없는 것을 말한다.” 라고 하여 성실함이 없으면 아무런 효과를 이룰 수가 없음을 말한다. 즉 성실로써 공리공론(空理空論)의 허례허식(虛禮虛飾)을 버리고 실천하고자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부산교육대
인물로 부상하였다.
그동안 《동호문답(東湖問答)》, 《만언봉사(萬言封事)》, 《성학집요(聖學輯要)》 등을 지어 국정 전반에 관한 개혁안을 왕에게 제시하였고, 성혼과 '이기사단칠정인심도심설(理氣四端七情人心道心說)'에 대해 논쟁하기도 하였다. 1576년(선조9년) 무렵 동인과 서인의 대립
우리나라 고대에서 근대에 이르기까지의 대표적 교육사상가 중 1명을 선정하여, 그의 생애와 교육사상의 특징을 설명하시오.
Ⅰ.서론
조선의 대부분의 학인들이 학자로 대성하거나, 벼슬길에서 탁월한 업적을 남겨 관료로 성공하거나, 제자를 키우는 일 등 한 면에서 성취를 이루는 데 이에 비해 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