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이듬해 1월 군함을 이끌고 무력시위를 벌이며 개항을 요구하였다.
모두 12조로 이루어진 이 조약은 20개월 안에 부산과 그 밖의 두 항구를 개항하며, 일본은 수시로 조선의 해안을 측량할 수 있도록 하고, 개항장에는 일본인의 조차지를 설정하며, 그들의 치외법권을 인정하는 것 등의 내용을 담
일본과 청에 각각 조사시찰단과 영선사를 보내어 각종 과학기술들에 관하여 견문을 넓히고 오도록 하였다. 이는 곧바로 한성순보(漢城旬報)의 창간으로 이어지며, 개화사상 보급과 지식의 대중화에 기여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러한 서양 철학과 과학의 전파가 한성순보를 낳는 계기를 마련했고, 더
개화한 일본을 보고난 후 감명을 받아, 견문한 바를 수집하여 후일 국민계몽의 자료로 삼고자 집필
- 1882 귀국한 뒤에 일본에서 적어 놓은 기록들을 편집하다가 원고를 잃어버림
- 1883 미국유학, 유럽 여러 나라를 순방 통해 견문을 넓히고 지식을 닦음
- 1885 귀국하자마자 개화파로 몰려 백록
. 그 가운데 한국역사연구회가 다년간에 걸쳐 근대사연구의 신진 기예의 역량을 집중적으로 동원하여 편찬한『1894년농민전쟁』1˜5(역사비평사, 1988˜1995)는 농민전쟁의 배경?전개?귀결을 경제?정치?사상 등의 제분야에 걸쳐 종합체계적으로 다루고 있는 성공적인 대기획물이다. 이 기획에 참가한
. 그것에 자극을 받은 조선은 정부는 정부대로 그들의 교육을 받아들여서 서당이 아닌 새로운 체제의 교육을 기획하고 시행을 하게 되었으며 각각의 나라에서 들어온 여러 선교사들은 그들 나름의 교육 사업을 펼쳐 나갔다. 이에 자극을 받은 민족 운동가들도 그들 나름의 교육을 만들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