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宋)와 통교하였고, 유연(柔然) 등 새외(塞外) 민족과도 통교하면서 외교관계를 확대하여 중국을 견제하였다. 427년 남하정책의 일환으로 수도를 고조선의 문화 유산지인 평양으로 천도하여 집권적 정치기구를 정비하고 국력을 신장시켰다.
남하정책에 위협을 느낀 신라와 백제는 나제동맹(羅濟同
왕은 정복 군주로서 백제를 공격하여 임진강과 한강까지 진출하였고 북으로는 후연(後燕)을 쳐서 요동(遼東)을 차지하고 숙신(肅愼)을 복속시켰음. 이어서 장수왕은 제도의 정비와 대외 외교 관계를 확대하여 중국을 견제하였으며, 장수왕 15년(427) 수도를 평양으로 옮겼다. 고구려의 남하정책에 위협
백제의 영역이었다. 그 후 고구려의 남진정책(南進政策)으로 475년에는 고구려의 영역에 들어가게 되어 나제 연합군이 재탈환하게 되는 551년까지 이 지역은 고구려의 관할 하에 있었다. 이에 대한 이견이 제시되었는데, 《삼국사기》의 내용 중 장수왕이 한성함락 후 철수하였다는 기록과 웅진천도 이
고구려의 역사를 기록했을까? 고구려의 역사를 남겼다는 것은 당시 우리민족은 고구려사를 우리의 역사라 인식했음을 알 수 있다.
둘째, 삼국의 언어는 기본적으로 비슷
고구려와 백제 또는 고구려와 신라의 사신이 서로 통역했다는 기록이 없고, 또한 고구려장수왕 때 백제 개로왕의 신하인 재증걸
장수태왕은 그 영토를 아산만, 곧 흥해까지 남하하였다. 그러나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고구려는 그 천손사상으로 인하여 정벌지역을 복속시키지 않고 제후국으로 남겨두는 정책을 선택하였는데 이것은 결과적으로 백제와 신라의 재기에 기회를 주게 되었고 후일 남방영토를 잃게 되는 단초를 제공하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