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저한 유교국가를 건설하려 하였다. 하지만 정몽주(鄭夢周), 이숭인(李崇仁)등의 온건개혁파의 생각은 달랐다. 그들은 고려왕조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순차적으로 개혁을 실지하여 사회 전반에 무리가 없도록 하는 것이 신하의 도리라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이들은 항상 서로를 경계하며 대립하였다.
고려 말 온건 개혁파로 조선의 건국에 참여하지 않고 재야로 물러난 길재 등의 학문적 전통은 성종 때에 본격적으로 중앙 정계에 진출한 사림이 계승하였다. 이들은 형벌보다는 교화에 의한 통치를 강조하였으며, 공신과 외척의 비리와 횡포를 성리학적 명분론에 입각하여 비판하고, 당시의 사회 모순
대립은 우왕 14년 5월 이성계에 의해 단행된 위화도 회군이 결정적인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신진사대부들이 위화도 회군을 계기로 첨예하게 대립하고 갈등하게 된 것은 현실적인 대응방식의 이견에서 왔습니다. 즉 고려말의 신민으로서 고려에 충성을 다해야 한다는 대의 명분으로 고려를 중흥시키고
명분론에 어긋나는 것이기 때문에 세조나 그의 즉위에 참여한 학자들은 성리학적 명분에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세종대에 양성된 유학자들 사이의 사상적 분열이 심화되는 가운데, 비유교적이며 비성리학적인 경향을 띄는 방향에서 왕권강화와 중앙집권체제의 확립이 세조대에 도모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