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속요가 속해 있었다. 조선조에 와서는 고려조와 조선조에서 고려속가를 연행하는 목적이 서로 달랐음을 의미한다. 고려조에는 속악이 집단적이고 공식적인 가치를 지향하는 의미로도 많이 활용되었지만 조선조에는 주로 개인적인 유흥, 감정의 표출을 위해 활용된 것으로 해석된다. 이와같은 현
1. 속악가사의 성격
<고려사> 악지(樂志)에 소개되어있는 고려의 악은, 국가에서 관장하며 궁중에서 전승하는 것만 거기 포함되어 있다는 점과 악은 음악 자체만이 아니고 춤ㆍ놀이ㆍ말로 된 노래 등을 두루 포괄하는 복합체라는 두 가지 점에서 예사 음악과 다르다. 중세의 지배체제를 장식하는 국
신라 시대 말에서 고려 시대로 이행기의 나라상황은 매우 혼란스러웠다. 국가의 수탈이 심해지면서 통치력이 약화되고 항거하는 세력이 도처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두각을 나타냈던 반란세력 지도자들 중에서 견훤과 궁예가 위세를 떨치며 백제와 고구려를 재흥한다고 나섰다. 후삼국시대가 시작되고
고려를 방문한 徐兢의 『高麗圖經』 및 『宋史』에서도 향악이라는 말은 중국음악인 당악의 대칭어 곧 우리 민족음악의 뜻으로 사용되었다. 그런데 鄭麟趾 등 조선초기 유학자들은 향악 대신에 俗樂이라는 용어를 『高麗史』樂志에서 사용하였다. 비록 『高麗史』樂志에서 속악이라는 용어가 쓰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