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사상을 바라봄에 있어서 구체적인 禮의 행동 지침까지도 따라야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구체적인 禮란 당시 사회를 반영하는 모습이었을 뿐 시대에 따라 변화할 수 있는 가변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논어와 같은 고전에서 불변하는 인간관계의 본질 을 다룬 것만을 구별해 낼 수 있
공자에 대한 종래의 설을 강력히 비판하면서 새로운 상의 공자를 제시한다. 본 글에서는 이러한 creel의 견해를 중심으로 유가 발생과 한왕조대 이후의 유가의 변질, 개혁가로서의 공자, 다른 학파와 유가의 대비, 유교와 서구 근대 사상 등을 살펴보았다. creel은 시공을 초월하여 수많은 사람들에 영향을
사상의 필요성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아도 될 만큼 절실해졌다. 그러나 그런 새로운 이상향의 제시에 앞서 과거를 통한 즉, 역사를 통한 해결책을 찾아보는 것도 해볼 만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근대에 들어와서야 생각하게 되었다는 민주주의 사상의 커다란 윤곽은 이미 공자에게도 존재했었으며
사상도 받아들여 집대성하였다.
그후 한(漢)나라의 무제(武帝)가 유교를 국교(國敎)로 택함에 이르러 공자의 지위는 부동의 것이 되었으며, 사실은 각 시대의 유교 내용에는 큰 변화가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공자 자체는 이 가르침의 비조(鼻祖)로서 청조(淸朝) 말까지 계속 존경을 받았다. 한국도 많은
사람다움의 출발(효(孝)와제), 실천(충(忠)과서(恕))
공자는 사람다움의 출발을 부모에 대한 효와 형제간의 우애 제라고 보았다. 그리고 그의 실천방법으로 충과 서를 말했다.
효(孝) 와 제
공자가 바라보는 효는 단순히 몸을 받드는 것이 아니라 정성을 다해 부모의 뜻을 받드는 것이 효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