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근대화 과정에서 자주적인 전신사업을 시행하고자하는 움직임이 어떤 이유로 열강의 방해를 받게 되었으며, 조선의 전신망구축 과정에서 나타난 한계는 무엇이고 이에 대한 조선 정부의 대응노력에는 어떤 것이 있었는지 알아보고자 한다.
(1) 개화기 이전 우리나라의 통신제도
개화기
진전되지 못하였다. 일제 강점기 동안 전기 공급은 주로 일본인과 상류층 또는 관공서, 회사 등으로 제한되어 있었다. 일반 가정의 전기 보급률은 무척 낮아서 1929년에는 약 6%, 1942년에 이르러서도 17.5%에 불과했다. 이런 보급률은 일본인과 조선인 사이에 심한 불균형을 보여주고 있었다. 1940년까지 조
과학기술 수준에 대해서 조사하여 이것이 당시 시대 상황과 관련하여 적질성을 가진 행위였는지 생각해 보고자 한다. 철도에 대해서는 일제의 주권 침탈 과정과 그를 위한 도구로서의 한반도 철도 형성 과정과 조선정부의 대응, 철도 부설 후의 사회경제적 영향력과 실태로 나누어 고찰하고 고종과 당
기술이 가지는 국가적인 의의라는 관점에서 조선의 전신 도입이 가지는 의미를 이해하고 조선정부가 전신의 도입을 위해 시행한 정책적 노력 및 발전 과정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또한 당시의 세계정세와 열강의 주권침탈로 인해 미비할 수 밖에 없었던 전신 기술 발전의 한계점에 대해 논의해보고
(東洋盟主論과) 탈아입구론(脫亞入歐論)이 등장하였는데, 동아시아의 전통적 중화주의 질서를 배격하고 근대 서구문명의 신질서에 동참하려고 했던 것이었다.
4. 청일전쟁과 일본의 동아시아 질서 재구축
메이지 유신 이래 일본의 외교는 크게 개항과정에서 구미 열강과의 불평등 조약을 상호 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