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초 기 강 경 진 압 ※
Ⅰ. 최초의 충돌
1. 전남대학교 정문
5월 18일 오전에 전날 비상계엄의 전국확대 실시 및 전국대학의 휴교조치가 취해진 것을 모르고 일상적으로 학교에 나온 학생들이 교문에서 계엄군에 의해 제지되었다. 이때 학교 수위실 옆에는 계엄군에게 심하게 구타당한 학생들 2,
민주. 민중이라는 성격을 우리 운동의 방향으로 규정해 준다.(전국민주학생연합, 「광주민중항쟁의 현대사적 재조명」, 1985)
1980년 5월 27일 이후, 5.18에 대한 언급과 서술은 항쟁을 진압하고 사실상 권력을 장악했던 신군부에 의해 독점되었다. 이들은 5.18을 ‘불순 정치집단’의 조종을 받은 ‘
준비하고 민중적 저항을 억압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으로 상정\"한(1989a) 군부와 \"이 지역 출신인 김대중에 의해 의제\"된 광주지역의 민주 민중적 지향이 충돌한 것이다(1989b).
우리는 이 문제를 자본주의적 발전의 속성인 지역간 불균등발전 속에서의 계급과 지역의 관계를 전제로 하여 일제의
광주민주화 운동이 일어났다. 하지만 이는 27일, 계엄군의 총공세로 많은 사상자를 내며 종결되었고, 이로 인해 서울의 봄도 끝나게 되었다.
④ 6월 민주화 운동
87년 1월 14일, 학생운동을 하다가 공안당국에 끌려 온 서울대생 박종철이 경찰의 물고문을 받다가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정부 측
광주의 아픔을 풀겠다”,“대접받는 지역으로 만들겠다”는 등 지역공약을 쏟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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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5 18광주민주화운동(5 18광주민주항쟁, 5 18광주민중항쟁)의 역사적 의의
1981년 9월에 전남대 교내시위 도중에 살포된 유인물에는 항쟁을 경험한 학생운동권의 5.18 인식이 극명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