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 7년(1615) 11월에는 왕기가 있다는 능창군 전(佺)을 교동에 안치한 후 살해했으며 대북정권에 호위된 광해군은 이어 대비폐출계획에까지 말려들어 광해군 10년(1618) 정월에 대비의 존호를 깎아 서궁이라 칭하게 한 대비유폐사건을 일으키고 말았다.
3. 서인이 내세운 인조반정의 명목
인조반정
광해군 5년(1613)에 공사가 끝났으나 다시 1623년의 인조반정때 인정전을 제외한 대부분의 전각이 소실되었다가 인조 25년(1647)에 복구되었다. 그 후에도 여러 번 화재가 있었으며, 1917년에 대조전 과 희정당 일곽이 소실되어 1920년에 경복궁의 교태전·강녕전 등 많은 건물을 철거하여 창덕궁으로 이건하였
Ⅲ. 비교
ⅰ. 집권 과정
1. 광해군
당시 선조 때 세자 책봉 문제로 임해군과 갈등을 빚었다. 그러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생하였을 때 국난에 대비한다는 명분으로 피난지 평양에서 세자에 책봉되었다. 선조와 함께 의주로 피난을 가다가 선조는 의주로 향하고 광해군은 평안도 지역으로 출발하
명을 하기에 앞서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연산군, 광해군에 대하여 언급할 필요가 있으며,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우리는 야사 속 연산군과 계축일기 속 광해군의 모습을 살펴보려한다.
(1) 야사 속 연산군
- 성종이 궐 안에서 몸소 기르던 사슴이 연산군의 옷과 손등을 핥았다. 연산군은 사슴을 걷
함께 식사를 하게 된다. 그 때 선조는 자식들의 지혜를 평가하고자 ‘가장 맛있는 음식이 무엇이냐?’ 고 묻는다. 이에 대해 다른 아들들은 여러 가지 음식을 말하는데 반해 광해군은 모든 음식의 기본이 되는 ‘소금이옵니다.’ 라고 당돌하게 말했는데 이는 광해군의 총명함을 보여주는 사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