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이념과 정책에 반영하였다. 1961년 군사쿠데타 이후 군사정권이 강조하던 담론은 반공과 경제발전 이었는데, 이후 자신의 필요에 따라 교육정책을 효과적으로 사용하였다. (민족주의를 내세운 까닭 : 북한과의 체제 경쟁을 하고 있던 시대적 상황에서 이해)
1) 반공, 국민경제성장, 근대화에 기여
경제개발이 국가 주도로 본격화 되면서 집권 여당은 많은 정치자금의 혜택을 누릴 수 있었지만 야당의 물질적 기반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기 때문에 동원할 수 있는 정치자금의 격차가 크게 벌어졌다. 박정희정권은 정치자금을 야당 의원들에게 일정부분 나누어 주면서 의원들을 매수하거나 통제했고
, 보이지 않는 부분에서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고, 특히나 경제 발전에 따른 대기업 중심의 경제 구조, 빈부격차의 심화, 그리고 의존적 경제구조 형성은 박 정권이 몰락한 이후에도 지속되어 한국 경제의 걸림돌로 작용하게 되었다.
파이만 키우면 그만?・・・성장의 그늘
경제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긴장 완화와 화해 분위기가 조성되고, 제1, 2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이 성공리에 달성된 후 1972년부터 1976년까지 제3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수립되어 추진되었다. 제3차 경제 개발 계획은 성장, 안정, 균형의 조화 추구, 중화학 공업 중심의 공업화, 그리고 국민 복지 향상
경제 발전을 자신의 정권의 기반으로 삼는 데 커다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1932년에 박정희는 대구사범학교 4기생으로 입학했다. 이는 그가 교직에 특별한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당시 관립사범학교는 수업료 면제 등으로 학비없이 수학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워낙 고등교육의 기회가 적은 시절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