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영화제작은 일본보다 10여년 뒤쳐짐 - 자본의 부재, 기기와 시설의 부재, 기술자의 부재
한국 최초의 키노 드라마(연쇄극) - <의리적 구토(義理的 仇討)>, 1919
그 당시 인기의 내리막길에 있던 신파극에 활기를 가져다 준 계기
부분적이나마 한국인의 손으로 직접 영화를 제작.
이러
야쿠자인 하야시 패거리들이 세력을 확장하여 종로로 진출하려고 하자 김두한은 한국인 상점들을 보호해주며 자신의 위치를 확고히 한다. 그러던 중 김기환이 일본인 형사를 때려눕힌 죄목으로 체포되면서 김두한은 종로 주먹계의 공식적인 우두머리가 되어 하야시 패거리들과 한판 대결을 벌인다.
영화사적으로 그 의의가 크다. 한국영화의 민족영화 태동으로 언급되는 “아리랑”은 종래의 한국영화가 열악한 여건에서 유치한 모방과 신파성을 극복하지 못한 점을 상기할 때 사실주의영화로서 그 진가를 발휘한다. 피폐한 농촌의 현실을 카메라에 담은 사실주의적 분위기는 일제에 억눌린 민족의
영화사나 제작소 수는 무려 40여 개에 달했다고 한다.
이런 이유로 나운규가 “한국 영화의 아버지”라는 평을 듣는 것이다.
5. 오늘날 찾아 볼 수 있는 그의 흔적(痕迹)
현재 춘사나운규영화예술제는 춘사(春史) 나운규(羅雲奎)의 영화에 대한 열정과 삶에 대한 투혼을 기리고자 1990년 제1회가 개
1919년 우리나라영화 < 의리적 구투 >가 만들어진 이후 적어도 1980년대까지 우리 영화는 이데올로기에 의해 지배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 한국영화는 ` 한국적인' 것을 두드러지게 드러냄으로써 식민지 지배에 수동적으로 저항하는 영화가 있었다. 해방과 한국 전쟁을 거치면서 반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