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와 편찬사무를 담당하는 수사관(修史官) 3명, 수사관보 4명, 서기 2명을 두었다.
따라서 본문에서는 근대의 역사 인식이 반영된 근대관찬사서의 변천에 대하여 간략히 알아보고 대표적인 관찬기관이자 일제 식민사관의 확산에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던 조선사편수회 안에 감추어진 내막에 대하
사의 왜곡과 식민사학의 부식도 이러한 식민통치의 정책의 일환으로 추진되었다. 또한 일제는 ‘조선사편찬위원회’ 및 조선사편수회를 조직하여 우리민족의 역사왜곡 및 식민사학의 발전을 추구하였다.
본문에서는 ‘근대관찬사서의 변화’와 ‘조선사편찬위원회’ 및 조선사편수회‘에 대해서
1. 조선사편수회 이전의 관찬사서 편찬
1894년 6월 28일 군국기무처는 의정부 산하에 編史局을 두어 “본국 역사의 편집을 관장”할 것을 결정하였다. 한편 이때 신설된 학무아문에는 편집국이 설치되고 여기에서 “국문 철자, 각 국문 번역 및 교과서 편집 등을 관장”했다. 따라서 의정부 편사국에서
사),양계(병마사)설치
cf. 고려 안찰사: 임기6개월, 임시순찰직, 상피제 원칙만 있고 적용안됨
조선 관찰사: 임기360일, 상주총책임직, 상피제 적용
cf. 상피제: 자기연고지로 부임못하고, 친족끼리 같은 관부에 못있게 하는 제도
양계의 방어사주, 진은 초기, 5도의 주부군현은 예종때 마련
군현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