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 1 章 序論
朝鮮에 있어 19世紀 後半期는 일대 轉挽期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조선이 東洋中心의 社會로부터 벗어나 西歐라는 異質的인 世界와 國際關係가 多變化되었고, 外勢의 排戰이 韓國民의 具體的 現實生活에 까지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金玉均을 中心으로 한 甲申政變을 평가한다는 것
일본인과 결탁한 것으로 결국 일본에 이용당하였다고 보고 있다.
리나영의 갑신정변과 개화파에 대한 이러한 새로운 평가는 이후 북한 학계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으며, 일본 및 남한 학계에까지 어느 정도 파급 효과를 남겼다. 갑신정변과 김옥균에 대한 평가 및 연구방향은 1958년 3월 조선로동당
개화파 그 중에서도 급진개화파라 불리는 개화당은 여러 가지 시대적 상황과, 주변 환경 요소에 의해 급진적인 개화 운동이라 불리는 정변을 일으키게 되는데 바로 갑신정변(甲申政變)이다. 이는 최초의 개혁운동 혹은 개화 운동이라는 점에서 의의를 가질 뿐만 아니라 조선의 시대 흐름상 굉장히 중요
개화파의 입지 및 정치적 생명을 위협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상 황에서 개화파가 1884년 시도한 정치적 변혁이 갑신정변(甲申政變)이다.
1884년 겨울 김옥균, 박영효, 홍 영식 등의 개화파들은 자신들이 주도하여 세운 우정국의 낙성식 연회를 이용하여 정치적 변혁을 단행하였다.
즉, 그들은 수구파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개화사상을 가지고 있었던 개화당은 조선에 대한 정치․경제․사회적 비판에서 1884년 갑신정변을 일으킨다. 삼일천하(三日天下)로 끝난 이 사건에 대해 학계의 평가는 긍정과 부정으로 나뉘어 있다. 이 글에서는 개화당의 형성과 성격, 그리고 갑신정변에 대하여 알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