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7년평양대부흥 운동은 결정적으로 서양의 종교인 개신교가 동방의 나라 한국에 자리를 잡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때문에 이 사건은 서양과 동양이 어떻게 만나고 서로 영향을 미치는지를 파악하는 중요한 단서이다. 구체적으로는 한국문화의 기초 이념이었던 유교가 개신교의 전파에 어떠
기독교를 매우 빨리 받아들인 이유 가운데 하나로 꼽았다.
또한 1907년1월14일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있었던 부흥회 첫날 저녁 상황을 목격하였던 스왈론 선교사는 이렇게 증언하였다.
“월요일 밤 성령의 은혜가 임하였다. 성령께서 놀라운 권능으로 현시하였다. 간단한 예배가 있은 후 온 회중
영적 차원의 새로운 소망과 용기와 위로를 주었다. 그래서 한국 교회는 선행된 이데올로기나 운동의 보조적 협력자의 위치에서 벗어나 새로운 차원의 민족교회, 즉 민족과 더불어 고난에 동참해서 형극의 길을 걸으면서 겨례를 기독교의 진리로 중흥시키는 이상(Vision)을 갖는 교회로 탈바꿈하였다.
2. 기독교 역사인식방법과 평양대부흥 운동에 대한 평가
우리가 역사에 대해 연구한다고 할 때, 그것은 과거에 있었던 사실 그대로의 역사가 아니다. 역사는 역사가의 주관적인 관점을 전제로 하여 서술되는 것이기에 우리는 역사가의 관점이 어떤 것인가 고려할 필요가 있다. 이는 한국 기독교 역
기독교 전통에 속하는 천주교 역시 이러한 기준에 의해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개신교의 이러한 종교관은 개신교의 종교자유 이해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타종교를 하나의 종교로 간주하지 않는 개신교의 태도는 타종교도 종교자유의 주체라고 하는 사실을 간과하게 만들었으며 이는 타자의 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