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부에서 오랫동안 일했던 아더 브라운(Arthur J. Brown)도 한국인들이 일본인이나 중국인들보다 “순하고 감정적”(docile and emotional)인 것도 한국인들이 기독교를 매우 빨리 받아들인 이유 가운데 하나로 꼽았다.
또한 1907년1월14일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있었던 부흥회 첫날 저녁 상황을 목격하였
대를 주저하지 않던 당시에 우리나라의 역사가 중국의 역사와 같이 길고 오래다 함은 시대적 배경으로 보아 벅찬 史意識과 자주정신을 볼 수 있으니, 단군정신을 통해서 우리는 조선고대사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단군신화는 많은 신이 동원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들이 농경을 중심으로 하면서
Ⅱ. 발단 - 평양대부흥운동의 전야
1906년 신년부흥회를 통해부흥운동의 열기가 더욱 더 저변 확대되기 시작하더니 1906년 하반기에 접어들어 평양선교사 사경회, 서울선교사 사경회, 목포부흥회, 그리고 장대현교회 준비기도회 등 네 가지 중요한 사건이 일어난다. 1906년 8월 26일부터 9월 2일까지 열
부흥을 위해 기도하는 일이 시작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교회에 부흥이 일기 시작하였다. 말하자면 하나님은 이러한 절망적인 현실에서 부흥의 불길을 선물로 주신 것이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한국교회에서는 1903년의 원산부흥운동, 1907년의 평양대부흥운동, 그리고 1909년의 백만인 구령운
교회 밖으로부터 유입되어 들어온 영향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현대교회가 경건을 가장하여 다양한 종교의 배경 속에서 나름대로의 경건을 찾고 있다는데 있다. 성경에서 말한 것처럼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이 사라져 버린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이뿐만이 아니다. 한국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