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동지들에게 상해 독립운동지사들의 동태와 실정을 알리고 무기와 폭탄 구입 제조의 가능성도 시사하면서 비밀결사단체를 통한 무력혁명의 정당성을 역설하여 그들의 동의를 얻어냈던 것이다. 차후에 김대지의 추천으로 의열단의 단장이 된 황상규의 처조카인 김원봉은 김대지와의 만남을
정부 주석으로 취임하고, 1940년 중경에서 광복군 총사령부의 직할군대를 조작하였다. 또 전당대회를 개최하여 한국국민당·한국독립당·조선혁명당 등 전체를 통합하여 한국독립당에 모든 역량을 집중시켰다. 39년 이후 40년, 44년 계속하여 주석에 임명되었다. 44년에는 OSS본부와 한·미간 군사합작을 결
정부안의 여러 직책에 임용되기에 이르렀다.
개화파들은 개혁사업을 통해 고종에 접근하여 그를 개명시켜 근대적 개혁에 앞장서도록 만들고자 하였고 또 개화파들 은 한성순보(漢城旬報)를 창간하여, 국민들에게 세계정세를 일리고 근대문물에 대한지식을 전파하였다.
개 화파 활동의 가장 큰 목표
조선혁명자연맹(유자명)의 좌파 4당이 기강에서 7당회의를 열었고, 이어 조선민족해방동맹과 조선청년전위동맹이 이탈한 5당회의를 열어 통일전선 형성에 박차를 가했다. 그리고 1940년에 중경에서 우파 통일전선으로 다시 한국독립당(김구.조소앙.이청천)의 결성을 보았는데, 이 모두 임시정부 주변에
초기부터 사건의 배후로 국민의회와 김구를 지목하였다. 경찰은 12월 4일 범인 박광옥과 배희범 등 용의자 5명을 체포한데 이어, 다음날부터 국민의회 간부 10여 명을 연행하였으며, 국민의회의장 조소앙과 임시정부의 선전부장 엄항섭까지 소환?심문하였다. 나아가 경찰은 강압 수사로 이미 김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