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임진왜란, 그 혼란기의 광해군과 인목대비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였다. 당시 조선의 왕은 14대 임금인 선조였다. 선조의 즉위는 16세기 초반 이래 지속되어온 훈구와 외척들의 척신 정치가 끝나고, 척신정치 시절 박해를 받았던 사림파들이 대거 조정에 진출하면서 바야흐로 정치판이 물갈이를
김제남(金悌男)이 영창대군을 옹립하는 종사를 도모했으며, 이에 인목대비가 수렴청정을 자청하였다는 공초(供草)를 읽게 되었다. 결국 광해군은 김제남을 중도부처(中途付處)하라는 명을 내린 데 이어, 영창대군에 대한 치죄(治罪)를 명한다. 그리고 다시 김제남을 사사(賜死)하라는 왕명을 내린다. 김
김제남(金悌男)이 영창대군을 추대하여 모반하려 한다는 무고로 김제남 부자와 영창대군은 참혹한 죽음을 당하고, 인목대비는 서궁인 덕수궁으로 쫓겨나 폐비가 되며, 그 뒤 갖은 고초를 겪은 끝에 11년 만에 인조반정으로 복위되었다는 내용이다. 《계축일기》의 작자로는 인조반정(仁祖反正) 뒤 대비
김제남을 제거할 계획을 세웠다. 박응서 등 강변칠우(칠서)는 이런 이이첨의 계략에 넘어가 자신들은 모반을 계획하고 있었으며 그 목적은 영창대군을 추대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김제남과 인목대비가 사주하였다고 진술하였다. 또한 상인을 죽인 것은 모반을 위한 자금 마련 때문이라고 자백하였다.
김제남(金悌男)이 주도하여 왕으로 옹립하려 하는 반역을 도모하였다는 허위자백을 구실로 김제남을 죽이고, 당시 영의정이던 유영경(柳永慶)을 독약을 내려 죽게 하고 영창대군을 서인으로 만들어 강화도로 유배 보내고 종국에는 강화부사(江華府使) 정항(鄭沆)으로 하여금 영창대군을 불에 타서 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