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나라에 도착한 초기까지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다. 더욱이 이런 사상은 그의 청나라, 특히 청나라 만족에 대한 인상에 영향을 미쳤다. 이는 청나라에 도착한 초기에 그가 『노가재연행록』에 적은 만족 인상에서 알 수 있다. 우묘, 「18세기조선 문인의 청나라에 대한 인식 연구」, 2010
김창업의
김창업이 진사에 합격할 당시에는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에 의해 남인이 정치적으로 실각하였고, 송시열을 위시한 서인들이 정권을 잡은 시기였지만, 그는 벼슬길에 연연하지 않았다. 비록 당시 가문의 후광이 있었겠지만, 이후에 찾아오는 정치적 시련은 그의 환로에 대한 생각을 접게 하였다. 그는
대한 심적 거리감은 더욱 축소될 수 있으며 이 순간의 설렘과 발걸음이 ‘가기(佳氣) 총총야라’에서 확인된다. 비록 한 수밖에 전하지 않지만 정철이 연행 도중 촉발된 감회를 시조로 표출하기도 했음을 보여주고 했다는 점에서 주목해 볼 만한 작품이다. 이처럼 조선 초기의 외국 체험 문학은
연행록 : 중국에 보낸 연행사의 사행기록
통신사행록 : 일본에 보낸 통신사의 사행기록
심미성, 성찰성이 풍부한 텍스트
- 중국에서의 사행문학
조선전기
- 조선이 매년 한 차례씩 세폐를 보냄
- 3대절에 한 차례씩 진공
- 청조는 이에 대해 회사할 뿐임
조선후기
- 1645년부터 동지사 일행에
조선은 명나라에 대한 사대주의적 관념과 형이상이학적인 문화에 빠져 청나라의 자연과학 방면의 기술을 배우지 못하였고 조선의 낙후한 정세를 바로 잡지 못하였다고 판단하였다. 「일신수필 박지원, 『열하일기』 (일신수필) 신광년에서 산해관에 이르는 9일간의 기록, 수레의 제도를 비롯한 중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