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혜석 개인전은 1921년 3월 18일부터 19일까지 경성일보사 후원으로 열린다. ‘나혜석 화회’는 여성미술가들이 많지 않은 처지에서 더욱 해외 유학생이라는 점으로 눈길을 끌었다. 나혜석(羅蕙錫)은 전시회를 앞두고 언론과의 대담을 통해 미술이란 국가와 민족의 문명이라는 견해를 내보인 뒤 우리미
나혜석)의 불행의 씨를 뿌려놓았던 것이라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C씨만 살았던들 행복한 일생을 큰소리 내지 않고 깨끗이 마쳤을 여사였었다. 그러나 불행히 애인을 잃고 난 S여사는 인생관이 돌변했었다. 인생의 모든 희망을 예술에 붙이고 예술을 애인삼아 붙들고 다시 일어서면서부터 실제 생활
3. 나혜석의 그림과 성과
3.1 한국 최초의 여성 화가에 대한 대접
나혜석은 우리나라 근대서양화의 제1세대로서 1920년대 초에 그 활동을 시작하여 1940년대 까지 계속 붓을 잡은 화가다. 고희동, 김관호, 김찬영 등이 화폭에서 손을 뗀 한참 후에도 나혜석은 화업을 계속했다.
그의 초기 작품들 중에
1) 그녀의 성장기 - 일본유학 시절
나혜석은 경기도 수원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개명 관료인 아버지 밑에서 그녀와 그의 형제들은 일찍부터 신교육을 받아 진명여학교를 우등으로 졸업한 뒤 오빠 나경석의 주선으로 일본 유학길에 올랐고 도쿄의 사립여자미술학교에 입학했다. 국내에서의 갇
Ⅰ.서론
羅惠錫(1896-1948, 호 晶月)2) 은 경기도 수원에서 羅基貞과 崔是議의 5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딸로서는 둘째이다. 본적은 京畿道 水原郡 水原面 新豊里 291번지(지금은 水原市 長安區 新豊洞 45번지 일대)이며 가정은 상류층에 속했다.
나혜석에 대해 세계문예대사전에는 여류서양화가, 시인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