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담(徐花潭)이항(李恒)김인후(金麟厚)기대승(奇大升), 그리고 성혼(成渾) 등도 모두 같은 시대의 성리학자들이다. 그들은 성리학을 우리의 것으로 소화함에 있어 자연이나 우주의 문제보다 인간 내면의 성정(性情)과 도덕적 가치의 문제를 더 추구하였으니, 이퇴계와 기대승 및 이율곡과 성혼의 사단
청년기
20세에 생원, 진사에 1,2등으로 급제, 고문에 능하여 시관들을 놀라게 하였으나
중종 때의 기묘사화로 훈고 세력에 의해 사림들이 탄압을 받자 시국을 한탄하며
벼슬을 단념
입신 단념 계기: 성리대전에서 노재 허형(魯齋 許衡)의 출처(出處)에 관한 글을 읽음.
“이윤의 뜻을 뜻으로 하고
학파와 현대사회’라는 강연에서 본 연구소를 정식으로 창시하면서 연구소의 연구방향을 첫째 역사적·철학적 방법, 둘째 사회학적 방법, 셋째 문학비평적 방법이라고 하면서 특히 문화의 평가 및 정의에서 문학 분석의 역할을 강조하였다. 그리하여 리처드 호가트가 초대 연구소장으로 있던 초창기의
학파의 맹아기라 할 수 있다.
18세기에는 17세기에 싹텄던 실학적 문제의식과 사상적 요소들이 정리되어 실학파의 학파적 성립을 보게 된다. 성호 이익을 중심(大宗)으로 하고 권철신 · 이가환 · 안정복 등이 주축이 되어 제도개혁론을 주장하는 18세기 전반의 성호학파와 청나라의 문화와 청에 들어
학파의 형성과 전개』, 일조각, 1995, 410~421쪽
,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정구의 학문이 이황과 조식의 학풍을 함께 계승한 점을 중시하고 허목의 학풍도 조식의 영향을 받은 면이 많다는 지적도 있다. 권인호,『조선중기 사림파의 사회정치사상』, 1995, 274~276쪽
허목의 학풍은 육경六經 고학古學 중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