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론계(老論系) 문인들에 의해 당시(唐詩)는 물론 송시(宋詩)도 재평가되기에 이르렀다. 김창협(金昌協, 1651년~1708년)과 김창흡(金昌翕, 1653년~1722년)은 이러한 문단의 흐름을 주도하였다. 따라서 본론에서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전후한 17세기 조선 한문학의 새로운 경향에 대해 서술해 보겠다.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전반에 활동한 노론계 문인,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사정士精, 호는 담정潭庭이다. 김려는 1766년 노론 시파 계열 인물인 김재칠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문장에 뛰어났으며, 특히 공령문攻令文을 잘 하던 인물이었다.
김려는 15세 이른 나이에 성균관에 들어가 27세 때
노론계로 인물성동론을 주장하는 낙론계열에 속한다. 특히 연암의 숙부 박사근(朴師近)이 낙론의 일거두(一巨頭)였던 박필주(朴弼周)의 양자가 된, 고무가 김창협의 고제(高弟) 어유봉(魚有鳳, 1672~1744)의 집안으로 출가하였으며, 그 자신은 어유봉의 고제이며 사위인 유안재(遺安齋) 이보천(李輔天, 1714~
노론계 인사들 특히, 혜경궁 홍씨의 아버지이며 세자의 장인인 홍봉환의 견제는 특히 더 심했다고 한다. - 혜경궁 홍씨는 노론. -
그러던 중 나주 벽서사건이 터지자 범인을 잡아 이를 문초하는 과정에서 벽서를 일으킨 일개 민간인의 자발적인 사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범인과 소론이 관계성이 있는 것
노론계 인사들이 사사되거나 벼슬에서 물러나는 등 당쟁으로 인한 피해를 고스란히 목도했다. 또한 명이 망하고 청이 천하를 지배하게 되어 성리학적 질서가 무너진 후, 점점 조선 역시 청에 타협적인 노선으로 기울어져 가는 것을 개탄했다. 그러한 상황에서, 그가 택했던 신념 표출의 방법이 바로 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