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다리 설계 ․ 가설하고, 수원성 축조에 거중기를 창제 ․ 실용화시켜 비용을 절감했다.
에 자신의 과학 지식과 재능을 발휘하였다. 정옥자,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선비』, P. 299
정조 18년(1794년) 암행어사로 순찰 나갔다가 당시 농촌의 비참한 참상을 목격하고 농민을 위한 정치 ․
배다리의 준공과 1793년 수원성의 설계를 손꼽는다.
1791년 윤지충․권상연의 옥 이후 천주교로 인하여 세정이 소연하던 중 1795년 주문모 신부의 변복잠입사건이 터지자, 정조는 수세에 몰린 다산을 일시 피신시키기 위하여 병조참의에서 금정찰방으로 강등 좌천시켰다. 불과 반년도 채 못 되는 짧은
유람하여 여유있는 생활을 보내기도 하였다. 이와 함께 신작, 김매순, 홍석주 등과 교유하며 학문을 토론하기도 하였다. 이 시기는 유배지에서 쇠약해진 심신을 추스리며 자신의 생애와 학문을 정리한 기간이라고 할 수 있다, 다산은 고향으로 돌아온 지 18년 만에 75세의 일기로 숨을 거두었다.
다산의 역량
31세 때(임자년, 1792) 봄에 홍문관의 수찬(修撰)이 되었다. 4월에는 아버지가 진주 임소에서 돌아가셨다. 집에서 여막살이를 하는 다산에게 정조는 임무를 맡겼다. 정조가 기유년(28세, 1789) 겨울에 한강에 부교(浮橋:배다리)를 놓을 때 다산이 그 일을 성공적으로 해낸 것을 상기하면서, 다
많은 천주교에 대해 묵인하는 이러한 정조의 비교적 너그러운 정책으로 천주교의 교세가 점점 커져 갔다. 그러나 1800년 정조가 죽고 뒤를 이어 아직 어린 순조가 왕위에 올랐다. 임금이 나이가 어려 나라를 다스릴 수가 없자, 정순왕후 김씨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정약용을 모함하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