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중기를 창제 ․ 실용화시켜 비용을 절감했다.
에 자신의 과학 지식과 재능을 발휘하였다. 정옥자,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선비』, P. 299
정조 18년(1794년) 암행어사로 순찰 나갔다가 당시 농촌의 비참한 참상을 목격하고 농민을 위한 정치 ․ 경제 개혁안을 구상 ․ 발표하였다.
다산 서거 100주년 기념회’를 발기해 다산 정신 확산에 나섰다. 당시 동아일보는 ‘조선사상 태양적 존재인 다산 선생의 위업을 추모하기 위하여’라며 기념회 발기 취지를 소개했으며 ‘정다산 선생 서세 100년을 기념하면서’라는 사설을 싣기도 했다. 1935년 7월 16일 동아일보 3면에는 다산 정약용 서
개혁 의지가 현재 대통령과 우리 국민의 그것과 닮아있다. 기득권층의 굴절된 의식과 저항이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듯이. 여기에서 더욱 다산과 같이 시대 의식을 지닌 대학자들의 등장이 기다려진다. 그러나 시대가 다산을 몰라줬듯이 정보의 홍수 속에 그리고 굴절된 언론 환경 속에서 그러한 대학자
백성이 있었을 뿐이다.
4. 고종의 매관매직
대한제국 시기에는 각종 부정부패가 난무하던 시기였다. 당시 지방 수령 등의 관직에는 공공연히 정가가 붙어 판매됐으며 여기에 필요한 자금을 전문적으로 대부하는 사람까지 생겼다. 이렇게 된 것은 부를 획득하고, 유지하기 위해서 권력이 있어야 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