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원군세력을 밀어내고 하층민의 저항을 무력으로 진압하였다. 결국 외세에 의지하여 정권을 회복할 수는 있었지만 이러한 방식의 정권회복은 조선의 자주 국가 건설을 가로막는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하였을 뿐 아니라 외세의 침투를 더욱 크게 허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뒤 점차 청국과 일본 양대
청국의 힘에 의존하려는 민씨 세력이 이에 반대하는 개화파가 대립되었으며, 정치적으로 수세에 몰린 갑신정변 주도파는 국제여론을 빌어 조선에 대한 청의 간섭을 저지하려고 하였다. 개화파는 일본의 힘을 활용하는 동시에 개화파 자체의 군사력을 중심을 정변을 단행할 계획을 세웠다. 특집 : 동양
대원군이 실각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동부승지 최익현(崔益鉉)의 탄핵 상소에서 비롯되었지만, 그 배경에는 10년 동안의 강권 통치로 인하여 반대 세력이 많아진 것과 야심 많은 고종의 왕후 민씨의 권력욕이 큰 몫을 차지했다. 대원군이 물러나자 정권은 민씨 일파의 독무대가 되었고, 사회적 악폐가
세력이 후퇴하고, 반일 보수층을 기반으로 하는 대원군 집권, 제물포조약으로 영사관 보호명목으로 일본군이 주둔하게 된다.
2. 2장
대원군 체포되다.
대원군이 청국으로 압송되었다.
3. 3장
난(亂)이 스쳐간 후
청일 양국 군대의 주둔으로 친청사대당과 친일개화파의 대립이 격화되었다.
정권을 앞세워 정치 경제 군사 등 모든 분야에서 종주권을 행사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궁성을 장악하여 크고 작은 정사를 일일이 간섭하였다. 이에 따라 자주근대화를 표방하고 개화당 요인들이 추진하던 개화정책은 집권파 인사들에게는 위험시될 수밖에 없었고, 개화당은 곧 경계의 대상으로 주목